봄 여름 가을 겨울을 걷다

벽기차를 타고 상경했다. 이번 명절은 남들보다 덜 부지런한 관계로 열차 공석을 찾지 못 했다. 입석으로 낮 시간에 오는 방법도 있었지만 두 시간을 덜덜거리는 기차 위에 서 있기는 싫었다. 오전 한시 반. 기차에 올라 자리에 잡았다. 영화 한 편을 틀었다. 라는 영화. 음악은 아련하고, 소리가 주는 구슬픔은 새벽 감성과 조화롭게 어울렸다. 감성은 새벽을 타고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미술관이 가고 싶어졌다. 으로 떠나는 속 좋은 구실이다.

110A 버스에 올라 창밖을 감상했다. 아직 명절이 채 가시지 않아, 거리는 한산했다. 차들은 조금씩 밀리고 있었지만 보행자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부암동 언덕배기 길을 올랐다.

상명대학교 앞뒤로 크고 작은 집들이 보인다. 부암동 언덕 위는 부촌과 빌라가 섞여있다. 같은 공간을 향유하는 두 종류의 경제 집단. 서울의 언덕진 곳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런 광경은 볼 때마다 좀체 적응이 되지 않는다.

미술관으로 가는 길은 종로로 향하는 차들과 서대문구로 길을 떠나는 차들로 분주했다. 왕복 6차선 도로 위를 차와 바람이 시원스레 질주한다. 머지않은 곳에 이 있다.

사진출처: 윤디자인 윤톡톡 블로그(yoon-talk.tistory.com/182)

은 2012년 8월에 개관한 미술관이다. 이름만 들으면 서울시가 관리하는 미술관인 것처럼 보이지만 유니온약품그룹 안병광 회장이 설립한 개인 미술관이다. 국내 사립 미술관으로는 리움 다음으로 큰 규모다. 2013년 즈음 미술관을 찾았을 땐 사진 촬영이 금지였는데, 요즘엔 사진 촬영을 허하고 있다. 미술관이 점점 변하고 있다. 공유에 대해 관대해지고 있다. 수익성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손익을 따져본 뒤 결정한 일일 것이다.

전시는 총 세 가지로, 이 소장하고 있는 100여 점의 작품으로 구성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걷다]와 호랑이를 주제로 하는 [백성의 그림전 첫번째 “대호”], 마지막으로 2015년 기획인 [미인美人: 아름다운 사람]이다. 한 번의 입장으로 세 가지 전시를 모두 관람할 수 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걷다] (2015년 10월 16 – 2016년 8월 28일)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어보자.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걷다:

Walking the Spring, Summer, Fall, and Winter

  • 전시기간: 2015년 10월 16일 – 2016년 8월 28일
  • 참여작가: 김기창, 김병종, 김종학, 김주경, 김학수, 도상봉, 도성욱, 변관식, 사석원, 안병석, 오치균, 이마동, 이수동, 전병현, 정건모, 최선호, 최재형 등(총 18명)

본 전시는 서울미술관의 소장품으로 구성한 기획전으로,
사계절의 변화 속에서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풍경들을 선보인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의 순환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와 정취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적인 공간과 인생의 길을 되돌아볼 수 있다.
향수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전시이다.

사계절의 정취를 다루는 전시다. 바닥에는 의 소장품들을 한 줄로 꿰는 듯한 문단이 죽 이어져 있다. 문단은 아래와 같다.

1. 열심히 살아왔다. 큰 후회 없이 남에게 피해 끼치지 않으며 맡은 바 소임을 묵묵히 감당하고 살아왔다. 남들이 고비라고 말하는 인생의 몇몇 순간들을 큰 불만 없이 숨을 고르며 잘 버텨왔다. 아니 그럭저럭 남들보다 잘 지내왔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그 꿈을 꾸기 전까진.

Blossom, 2010, 캔버스에 혼합재료, 181x227cm, 전병현

전병현 작가의 그림은 은은하다. 표면의 질감이 주는 거칠거칠함과는 대조적인 감상이다. 이런 느낌은 그가 작품을 표현하는 기법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화가는 물감을 사용해서 화면의 입체감을 표현하는 대신(임파스토impasto기법이라고 한다), 캔버스 위에 한지 죽으로 먼저 형태를 짜고 그 위에 안료를 착색시킨다. 캔버스에 죽을 올리는 방식은 조소적이고, 색을 입히는 방식은 회화적이다. 그의 작품이 형태가 분명하면서도 그 감정이 몽롱하게 올라오는 이유다.

망양대가 온통 꽃무더기니 이를 어쩌나, 2007, 캔버스에 유채, 80x117cm, 사석원 (1960-)

2. 그날 밤 꿈은 참 이상했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숲 속에 덩그라니 놓여진, 내 눈 앞에 숨막힐듯. 아름답지만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벚꽃과 진달래가 가득 핀 숲속은 질릴 정도로 꽃 내음이 가득했지만 – 아름다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를 만큼 그 앞을 서성였다.

나무, 1979, 캔버스에 유채, 45×52.5cm, 이대원 (1921-)

4. 시간이 나 자신을 통과해 한없이 흘러만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해 두 해 열심히 살아왔지만 내일의 시간도 내년의 시간도 여전히 반복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는 앞으로의 내가 기대되지 않는다.라고 계속 마음 속의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깊은 산 속 진달래, 2007, 캔버스에 아크릴, 130x194cm, 오치균 (1956-)

6. 꿈 속의 풍경을 더듬어 숲에 도착했다.

깊은 산 속 진달래, 2007, 캔버스에 아크릴, 130x194cm, 오치균 (1956-)

치균 작가의 그림은 가까이서 보면 그 형태가 모호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멀리서 그림을 감상하노라면 마치 퍼즐이 맞춰지듯 하나의 장면이 완성되는데, 이는 그가 손가락으로 작품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오치균은 지도指圖 화가다. 손가락을 캔버스에 어떻게 갖다 대냐에 따라 그 대상의 강도와 세기가 결정된다. 깊은 산속 덩그러니 핀 진달래 무더기가 팝콘처럼 튀어 오르는 듯 보인다.

청사과, 2008, 한지에 유채, 108x242cm, 윤병락 (1968-)
청사과, 2008, 한지에 유채, 108x242cm, 윤병락 (1968-)

병락 작가는 ‘사과 화가’라고도 불린다. 화가는 경북 영천 출신으로 사과 농장을 경영하는 부모님 곁에서 자랐다. 사과를 극사실적으로 그리는 작가는 캔버스 자체를 사과 상자 모양으로 재단하고 한지를 바른 뒤, 그 위에 작품을 표현한다. 어쩌면 작가는 싱그럽고 생생한 사과의 모습을 그리면서 어린 날의 부모님과 자신의 초상을 추억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여름 섹션 작품들. (왼쪽부터) Condition Lioght, 도라지꽃, 바람결-강변에서

7. 복잡한 마음을 달래며
숲을 걷다보니
마음이 넓어진다

자연법-봄1, 2005, 종이에 아크릴, 95x197cm, 고영훈(1952-)

8. 바람을 마주하고 있다보니
마음에 빈칸이 생긴다

바람결-강변에서, 1990, 캔버스에 유채, 130.3x194cm, 안병석(1946-)

병석 작가의 는 바람을 따라 움직이는 듯한 보리의 흐름과 그와 동조하며 파동을 일으키는 호수의 조응이 아름답다. 작가는 날카롭고 세밀한 터치를 표현하기 위해서 층(layer)을 두고 그림을 완성하는데, 색을 여러 겹으로 칠한 뒤,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내는 방식으로 표면 아래에 있는 색을 떠낸다. 이렇게 표현한 작품은 층이 주는 깊이감과 더불어 생기가 돈다. 흐릿한 전경과 가늘게 날리는 청보리가 인상적이면서도 생생한 느낌을 전달한다.

도라지꽃, 1985, 캔버스에 아크릴, 64x90cm, 김종학(1937-)

9.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내 마음이 바다가 된다

부부석상, 1986, 캔버스에 유채, 51x44cm, 김상유(1926-)

: 여름섹션 끝


가을 섹션은 ‘사과 화가’, 윤병락 작가의 작품으로 시작한다. 새빨갛게 익은 사과 알이 탐스럽다.
일락정, 캔버스에 유채, 39x51cm, 김상유(1926-)

일락정(日樂停)은 ‘해가 즐거이 머무르는 곳’이라는 뜻이다. 조용히 명상을 즐기고 있는 선인과 노란 초가지붕을 붉은 해가 덮고 있다. 단조로운 색의 활용과 단순한 선의 방향성이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는듯하다.

감 시리즈, 모두 오치균 작가의 작품

11. 붉게 물들은 들판과 나무들이 내 지나간 시간을 길게 축복해 주는 듯하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따뜻한 풍경들이 나를 위로한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잘하고 있다고 사람 좋게 등을 두드려 준다.

감, 2008, 캔버스에 아크릴, 70x139cm, 오치균 (1956-)

오치균 화가의 이다. 손가락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유일하게 붓을 쓸 때는 자신의 이름을 남길 때뿐이다. 의 영감은 작가의 어린 시절에 기원한다. 화가는 대전에 작은 변두리 마을에서 살았다. 가난했던 오치균 화백은 어린시절 감나무를 따서 자신이 먹는 게 아니라 시장에 내다 팔아야만 했다. 그에게 은 서러움과 그 시절 향수에 대한 표현이다. 아련하고 또 아득하다.

(왼쪽부터) 흰 이슬, 꽃무더기 모두 사석원 작가의 작품
꽃무더기, 2007, 캔버스에 유채, 사석원(1960-)

꽃무더기, 2007, 캔버스에 유채, 사석원(1960-)

13. 따듯한 마음을 안고 동네에 들어선다. 낯익지만 낯선.
마치 여기의 시간은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던것만 같은 곳. 고향.

흰 이슬, 2006, 캔버스에 유채, 129x194cm, 사석원(1960-)

14. 골목골목 어려있는 추억과 풍경들.
내가 혼자 걸어 오지 않았다는 옛 기억의 반가운 손 짓들.


: 겨울 섹션 시작

성탄날 새벽송, 2009, 한지에 수묵채색, 61x82cm, 김학수(1919-2009)
성탄날 새벽송, 2009, 한지에 수묵채색, 61x82cm, 김학수(1919-2009)

15. 함께가 아니었다면
겹겹이 쌓지 못했을 시간들.
그래서 감사하고 고마운 시간들.

시험 공부, 2005, 캔버스 위 아크릴, 78 x 117cm, 오치균 (1956-)

치균(위)와 황재형(아래)은 모두 경기도 사북 지방 탄광촌을 그린다. 그러나 그 느낌은 사뭇 다르다. 오치균 화가는 말한다. “허물어져가는 것의 아름다움을 나는 보았다”고. 그의 그림은 어딘가 모르게 따뜻하다. 남자의 손으로 거칠게 찍어 누르는 듯한 특유의 기법도 본 그림 앞에선 조금 누그러져있다. 황재형 작가는 오치균 작가와는 조금 다른 시선을 전한다. 그의 작품에는 사북 지방 탄광촌의 쓸쓸함이 느껴진다. 화가는 80년대 탄광부로 일을 하다가 90년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황재형 작가의 화폭에서 낭만보다 현실이 무섭게 쏟아지는 이유다.

쥘 흙과 뉠 땅, 황재형 (가나 아트갤러리 소장)

이제 다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걷다.
다시 힘내서.
또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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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라는 이름을 바꾸어 불러도 향기는 그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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