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디자인 展 | 02, 일민미술관 (3.25 ~ 5.29) 2층

그래픽 디자인전, 2005-2015, 서울

  • 전시장소: 일민미술관
  • 전시기간: 2016.3.25 – 5.29

일민미술관은 기존 대형 미술관들이 보여주는 입문하기 쉽고, 주제가 명확한 행보보다는 조금 더 감각적이고 이해가 필요한 주제의 전시를 한다. 이번 전시는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큰 제목을 중심으로 디자이너들이 어떻게 본 주제와 호흡하고 표현하는가를 표현했다. 이것 때문인지 전시장에는 그 흔한 리플릿 하나 발견할 수 없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그래픽 디자인(포스터, 책, 잡지, 로고타이프, 그리고 전단지 등)이 본 전시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시실에 들어가기 전. 창밖을 바라본다. 벌써 봄이다. 보온을 위해 입었던 두툼한 외투들은 모두 집에다 넣어 두고, 움트는 봄을 한껏 맞이한다. 일민미술관의 건물 외벽은 크림 색이다. 밖에서 보면 그 모양새 덕분에 딱딱하고 품위 있는 기관 같다. 하지만 미술관 안쪽은 따뜻하고, 한껏 열려있다.

(다른 미술관들에 비해) 일민미술관의 전시가 쉽지는 않다. 그렇지만 쉽지 않다는 것은 가장 중립적인 진리를 전달하기 위한 절제다. 일민미술관의 공간은 ‘마냥 느끼기에 적합한’ 곳임과 동시에 ‘육중하려면 한없이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광화문 앞에 툭 떨어진 이 크림색의 건물은 영감을 찾아 헤매는 힙스터들과 현대 예술을 향유하고자 하는 교양인들 모두의 입맛을 모두 충족시킨다.


<2층 전시실>

이제 2층 전시실로 들어가 보자.

2층의 전시는 그래픽 디자인의 평면적 한계로부터 달아다려 한다. 작품은 폰트 자체나 미려한 색 자체보다 자연물과의 조합, 그리고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형태로 등장한다. 작품들은 평면적이고 수동적인 모습보다는 관객과 호흡하고(Sasa [44] <일백일자도>, 코우너스/매뉴얼 <그2서, 리소 프린트 숍>), 입체적으로 드러나며(길종상가 <3차원 세계의 화답>), 현실 참여적(잠재 문학 실험실 <누적된 선언으로 (…) 종이에 나타난다>)이다.

일백일자도, 2016, Sasa[44] / 이재원

Sasa와 이재원 작가의 <일백일자도One Hundred One Letters>는 <101개의 지표>에 수록된 작품 101점에서 각각 글자 한 자 씩을 샘플링하고, 그렇게 모은 101자를 이용해 포스터와 가방 배지를 제작한다. 포스터는 하루에 44장씩 관객이 가져갈 수 있도록 비치된다. 필자의 경우 11번째 넘버링이 적힌 포스터를 손에 넣었다. <일백일자도>는 미술관을 일찍 방문한 사람들이 가져갈 수 있는 일종의 ‘수혜’다.

Sasa와 이재원 작가는 기념품과 포스터. 다시 말해, 가져갈 수 있는 작품으로 그래픽 디자인을 소개한다. 작가는 작품을 대중들에게 소유하게 함으로써 그래픽 디자인을 경이의 대상에서 체험의 대상으로 과감하게 내려놓는다.

아웃 오브 포커스, 2016, 전은경 / 원승락

 

오른쪽 벽으로 눈을 돌리자. 전은경과 원승락 작가의 <아웃 오브 포커스>가 보인다. 둘은 월간 <디자인>에서 함께 일했다. 이 작품은 월간 <디자인>에 등장했던 그래픽 디자이너들 사진을 편집하고 재구성한 작품이다. 본 작품에서 작가들의 얼굴은 모두 가려져 있다. 전은경과 원승락은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신의 디자인 스튜디오를 배경으로 찍은 인물 사진에는 인물 이상의 정보가 어쩔 수 없이 담기기 마련이다. 디자이너가 입은 옷과 앉은 의자, 책상, 책장, 바닥, 조명, 식물, 장식품 등등은 디자이너의 기호, 더 중요하게는 그가 동료와 공유하는 취향을 보여 주며, 때로는 그들의 형편을 암시하는 듯하기도 하다.

작품은 인물보다는 대상의 주변을 여실히 드러낸다. 작가는 적, 녹, 청, 황의 아크릴 판으로 말 그대로 인물의 포커스를 어긋나게(out of focus) 표현한다. 필자의 짧은 조예 탓에 단 두 명의 작가밖에 유추할 수 없었지만, 이런 유추 과정에서 작가들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은 자명했다. 물건을 통해 추리해낸 작가는 조금 더 색달랐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가장 쉽게는 본인에게 성격을 묘사해 달라고 부탁하는 방법이 있겠다. 평전을 제작하듯 측근을 인터뷰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어쩌면 그가 마시고 누리는 문화에 대하여 관찰을 하는 방식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공간’과 ‘소유물’을 가지고 대상을 파악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당신은 어떤 그래픽 디자이너인가요?”를 설명하는 제법 적확한 방법은 그가 어떤 도구가 있는 공간에서 작업을 하느냐 일 지도 모른다. 전은경, 원승락 작가의 방법이 통했다는 소리다.

아웃 오브 포커스, 2016, 전은경 / 원승락

월간 <디자인>은 1976년에 창간됐다. 이것은 약 40년 간 한국 디자인계의 중심에서 변화하는 현실을 기록한 매체다. <아웃 오브 포커스는> 디자인 역사 40년 사이에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와 그의 공간에 대한 유의미한 기록이다. 이 작품은 월간 <디자인>만이 해낼 수 있는 작업이다.

맨 왼쪽 길종상가, 필자의 흰둥이 맥북에 이 회사의 스티커가 붙어 있다

이제 <아웃 오브 포커스>에서 조금 떨어져 보자.

1층부터 건물을 관통하는 설계회사의 <빌딩>이 보인다.

<아웃 오브 포커스> 오른쪽 벽을 타고 잠재문학실험실의 작품이 보인다. 제목이 제법 길다. 작품명은 <기법 /// 누적된 선언으로 도출되는 기록이 물리적 방식으로 종이에 나타난다>이다. 감각적인 액자 오른편에 의미를 파악하기 쉽지 않은 시구가 적혀 있다.

잠재문학실험실은 <101개의 지표>에서 다섯 디자이너를 선정하고 이들의 작업에서 특정 지면을 선택한 다음, 그 지면에서 단어들을 고르고 원래 순서대로 조합해 시를 만들었다. 시어로 선택되지 못한 단어들은 인쇄방식을 사용하여 지워버렸다. 작품 속 시가 모호하고 흐릿하게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전하는 것은 문장의 분절 때문이다. 시는 한 가지 주제를 향해 열렸지만 추출만으로 구성한 문장이기에 매끄럽지는 않다.

목록 /// 악인이여, / 타라! (…), 2016, 잠재 문학 실험실

본 작품에서는 시어로 선택된 단어의 자리에는 구멍이 뚫리고, 의미를 잃는 나머지 단어들은 추상적인 그래픽 기법으로 꾸민다. 이것은 원 디자이너의 작품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순수하게 잠재문학실험실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물 초상, 2016, 잠재문학실험실

<인물 초상>의 시구(오른쪽)는 왼쪽 작품의 구멍이 된다. 남은 글자는 새로운 그래픽 디자인으로 재활용된다. 잠재문학실험실의 그래픽 디자인은 재활용이라기보다는 변용(變容, 용모를 바꿔 씀)이다.

왼쪽: 암시성 추상 도형, 2016, 잠재문학실험실(손예원)

다음은 길종상가의 작품을 만나보자. 2층의 꽤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작품명은 <3차원 세계의 화답>이다.

3차원 세계의 화답, 다양한 크기/아크릴, 2016, 길종상가

<3차원 세계의 화답>은 지난 10년간 생산된 그래픽 결과물을 대형 설치물과 소품 101점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제목 그대로 2차원 그래픽에 보내는 길종상가식 3차원 화답이다.

그래픽 디자인은 2차원의 세계다. 길종상가는 3차원을 고민하는 회사다. 전시장에 다소 생경하게 있는 길종상가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길종상가가 어떤 작품을 만드는 회사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3차원 세계의 화답, 다양한 크기/아크릴, 2016, 길종상가

길종상가는 박길종, 김윤하, 송대영이 함께 운영하는 곳이다. (홈페이지) 이들은 이미지의 평면성을 입체적으로 해석하고, 입체가 만들어내는 공간을 가지고 노는 것을 즐긴다. 에르메스와 2015년 여름에 함께한 <야자 공주와 요트 왕자의 결혼식>, 동년 가을에 했던 <공은 이미 던져졌다>는 그들의 작품 세계를 현실에 어떻게 끌어오는지 잘 보여준다.

<야자 공주와 요트 왕자의 결혼식>의 드로잉은 김윤하, 박길종, 송대영이 함께한 프로젝트이며, 신라호텔 에르메스 매장에 전시한 바 있다. 본 작품의 드로잉과 글은 엽서로, 이를 입체로 해석한 작품은 디스플레이로 사용했다.

<공은 이미 던져졌다> 프로젝트 역시 길종상가가 추구하는 바가 잘 드러난다. 길종상가는 주제가 주어지면(에르메스의 2015년 프로젝트명은 “플라뇌르(Flâneur, 산책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드로잉으로 2차원 세계에 드러내고, 그것을 다시 입체 공간으로 끄집어낸다.

길종상가의 <3차원 세계의 화답>은 그래픽 디자인을 바라보는 길종상가 고유의 표현 방식이다. 그들이 제시한 입체 공간을 어떤 각도에서든 평면에 투사(投射)한다고 상상해 보자. 아기자기하고 단순한 형태들이 금방이라도 그래픽 디자인으로 환원될 것만 같다.

길종상가의 작품 설명을 읽는 관람객

길종상가의 작품은 “이게 뭐야?”하는 반응이 가장 많이 나온 곳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래픽 디자인 자체는 ‘이게 뭐야’스럽다. 그래픽 디자인은 주제를 가지고 대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길종상가의 작품은 특정한 주제 의식을 지닌 물건들의 집합이라기보다 그래픽 디자인 자체. 즉, 콘텐츠를 표현하는 콘텐츠를 조형으로 드러낸다.

길종상가의 작품은 “이게 뭐야?”하는 반응이 가장 많이 나온 곳이기도 하다.

<3차원 세계의 화답> 중 101가지의 조형은 임의의(random) 조합으로 생성된 의미없는 집합 같다. 그러나 이것은 되려 그래픽 디자인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는 길종상가의 노력이다. 그래픽 디자인은 대상을 설명하려는 ‘매개물’이고, 길종상가는 그 매개체를 조형으로 표현한다.

길종상가의 작품을 통해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3차원의 만질 수 있는 형태로, 그러나 감히 이해할 수 없는 형상으로 현실에 발을 딛는다.

그래픽 디자인의 다른 말은 커뮤니케이션 디자인(communication design)이다. 그렇다면 커뮤니케이션은 무엇인가.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이전의 그래픽 디자인은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는가. 길종상가의 작품은 이러한 물음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를 제시한다.

우리가 잘 아는 물건(매체)들을 가지고 메시지를 재구성하는 것. 그래픽디자인의 사전적 정의다.

2층 전시실의 다른 면을 EH의 <이미지 IMG>가 크게 두르고 있다.

EH는 “가장 섬세하고 정확하게 촬영/합성한 그래픽 출판물이 객관적이고 사실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에 대해 질문한다.

EH는 물성(물체가 가진 고유한 성질)을 객관적으로 드러낸 모습이 어쩌면 물성이 더욱 흐릿해진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역설(과 가능성)을 작품 속에 끼워 둔다. 작품은 비현실적으로 섬세하고, 비현실적으로 비대하다. 그러나 그 표면은 한치의 색차도 없이 매끈하다. 친근하면서도 이질적이다.

IMG, 2016, EH

는 친근한 크기의 물체인 책을 납작한 이미지로 환원하고 거대하게 확대해 보여주는 사진 연작이다. 일반적으로 그래픽 디자인은 평면을 다룬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 그래픽 디자이너가 하는 작업이 순수한 2차원에 머무는 일은 드물다. 책에는 두께와 무게와 재료의 특성이 있고, 웹사이트나 동영상에는 시간의 차원이 있다.

EH의 사진은 그래픽 디자인에 내제 하는 3차원적 현실과 이상적 2차원 형태가 빚어내는 긴장을 포착한다. 그는 하나의 카메라 위치를 극미하게 이동해 가며 때로는 수백 장의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이어 붙여 하나의 이미지로 재구성한다. (…) 그 결과 육안으로는 경험하기 어려운 디테일을 드러내는 사진 속 사물은 거의 도표처럼 정확한 원근법을 보여 주는데도 깊이가 철저히 사라진 평면, 물성을 잃어버린 순수 광학 현상으로 나타난다.

2층 마지막 전시는 그2서, 리소 프린트 숍이다. 코우너스와 매뉴얼은 리소그래프라는 독특한 색감의 인쇄기를 이용하여 작품을 표현하고, 그 결과물을 관객들과 함께 나눈다.

이 작품을 주관하는 코우너스는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겸 출판사이자 리소그래프 전문 인쇄소다. 2012년 조호준과 김대웅이 소공동에 세웠고, 2015년 김대순이 합류한 당므 현재의 수표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매주 토요일, 코우너스에서 나와서 리소워크숍을 개최한다. 관객들은 작품을 인쇄하고 체험할 기회를 갖는다.

매주 토요일, 코우너스는 일민 미술관에서 <리소 워크숍>을 연다. 페이스북 사전 등록을 통해 예약한 10명은 이 곳에서 리소그래프 작품을 출력하고 인쇄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신청은 코우너스 페이스북 페이지(이곳)에서 할 수 있다.

리소그래프는 1980년대 말 일본의 리소카가쿠 사가 개발한 디지털 인쇄기다. 겉보기에는 일반 복사기처럼 생겼지만, 작동 원리는 등사판이나 실크스크린 등 공판인쇄와 유사하다. 결과물도 실크스크린과 비슷한 질감과 색을 띤다. 또한 공정 특성상 인쇄물에 잉크 얼룩이 묻기도 하고, 여러 색을 찍을 때는 색판이 서로 맞지 않는 일도 생긴다. 주로 학교, 클럽, 정치, 사회단체 등에서 저비용 인쇄술로 쓰던 기법이지만, 경제성뿐 아니라 한계와 단점도 특성으로 인정받으면서, 2000년대 들어서는 그래픽 디자인계에서도 쓰이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 10년 간 서구 독립 출판과 진(zine) 출판계에서 리소는 얼마간 결정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지만, 그 기술을 접하기가 어려웠던 국내에서는 한때 진귀한 기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현재 한국에서는 부산의 그린 그림, 서울의 코우너스 등에서 리소 설비를 갖추고 있다.

시험 인쇄를 마치고 버려진 인쇄물, 잉크가 묻는 방식이 실크스크린을 보는 것 같다

관객은 워크숍을 통해 <101개의 지표>에서 추출한 이미지를 선택하고 조합해서 자신만의 리소그래프 작품을 인쇄해 볼 수 있다.

왼쪽 상단에 리소그래프로 인쇄된 에이랜드 앰블럼과 모나미 연대기, 소금꽃이 핀다 등의 작품이 보인다
제2회 리소 워크샵에 모인 많은 사람들
워크숍과 전시 이후에 남는 인쇄물은 관객에게 무료로 배포된다

이제 전시장을 돌아 나오자.

1층의 주제가 그래픽 디자인을 소개하고 그 활동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었다면, 2층의 주제는 그래픽 디자인의 예술적 가능성을 확인하고, 그것의 본질인 소통(communication)의 역할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길종상가의 작품을 뒤로 EH의 작품이 전개되고 있다

이제 마지막 전시실을 향해 계단을 오르자.

다음 편에 계속.


본 글은 일민미술관의 <뮤지엄 리포터 2기>의 활동 기록이며, 일민미술관의 협조를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전시된 작품에 관한 모든 저작권은 일민미술관에 있으며, 사진과 글의 저작권은 작성자(소고)에게 있습니다. 본 포스팅은 비상업적인 용도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세이프 하버 조항에 따라 저작권자는 본 콘텐츠 작성자에게 게시 변경, 삭제 요청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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