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mal life, 김희수 작가

김희수

  • 전시 기간: 2017.02.25(sat) – 04.16(sun)
  • 장소: 에브리데이 몬데이(서울특별시 송파구 송파동 9-17, 지하철 2호선 잠실역)
  • 큐레이터: 심 지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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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다.

오랜 시간 동안 찾았던, 그러나 발견하지 못했던 소중한 물건처럼 김희수 작가를 찾았다. 아니다. 그가 스스로 나왔다고 하는 것이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하긴. 소중한 것을 찾았는데, 경위가 중요할까. 토요일 그의 전시 리셉션에 참석하기 위해 잠실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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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월드타워는 언제 봐도 그 위용이 대단하다. 건축이 실용의 기능을 지나 상징으로 도약한 지 오랜데, 이러한 건축을 마주하는 순간마다 느낌이 새롭다. 지난 <재심> 시사회 이후로 오랜만에 이 곳을 지난다. 호숫가 근처라 그런지 몰라도 부는 바람이 정직하다. 옷깃을 여미고 조금 더 움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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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하지만 평화로운 토요일이다. 사람들은 후드를 눌러쓰거나 목도리로 얼굴을 거의 덮다시피 했다. 그렇지만 꽁꽁 싸매고라도 나와야 할 이유가 있다. 토요일이니까. 그리고 내 의지대로 걷고 싶으니까. 좋은 사람과 함께, 때론 혼자도 괜찮다. 나의 자유 의지로 보내는 휴일은 모두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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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관광객 행렬이 가까워진다. 그들과 다른 언어를 쓰는 나이지만, 밝은 표정에서 그들이 느끼는 흥분과 기쁨이 느껴진다. 팔짱을 한껏 끼우곤 행복을 향해 빠르게 걷는다. 그들의 모습에 괜스레 내가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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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역을 나와 잠실 호수교를 건넌다. 오른편에 보이는 매직 아일랜드.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아름다운 아파트 불빛. 바로 앞으로 꿈의 나라를 향해 흐르는 자동차 행렬. 아마 이 행렬 중에는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시간대 일을 나가는 사람도 있겠지-하고 생각한다. 각자의 시간은 비슷한 듯 모두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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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호수 사거리와 예쁜 도자(pottery)를 파는 가게들을 조금 더 지나면 에브리데이몬데이다. 매일이 월요일(Monday)이 아니다. 아기자기하지만 가슴을 통통 뛰게 할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 같은 건물이 몬데이다. 김희수 작가가 개인전을 갖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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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일층으로 내려가자. 입간판처럼 선 작가의 작품이 바로 보인다. 우리의 일상, 혹은 타인의 삶이 언듯 드러난다. 일상, 그러니까 노멀 라이프(normal life). 김희수가 조명하는 주제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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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민감한 사람이다(We are all sensitive people), 김희수 2017.02.25

우리는 모두 민감할 때가 있다. 민감하다는 뜻은 그 의미가 부정적이지 않을 때를 말한다. 아니다. 부정적일 때도 포함한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안테나가 비죽 올라와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상태다. 그때가 오면 우리는 좋던 싫던 관찰을 시작한다. 옆 자리 사람이 코에 주름이 생길 듯 킁킁대는 모습, 큰 걸음으로 뛰어오는 연인의 발소리, 휴대폰이 뚫어지도록 타격하며 앞을 지나는 중년 남자 등. 모든 일상들이 모션 픽쳐처럼 촤라락 소리를 내며 눈 앞으로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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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의 작품은 작가가 한껏 예민해진 순간 그 마음도 몰라주는 무심한 타인의 모습이다. 뚝뚝 떨어지는 선, 자신의 일에 집중하겠다는 듯 가볍게 감은 눈, 자연의 색채를 자유롭게 벗어던지고 자신의 색으로 발화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려진다. 그것은 초월적이면서도 한없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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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두 사람의 말 없는 터치, 그리고 상대의 팔을 기둥 삼아 휘감아진 팔. 작가의 시선 따위는 의식조차 못하는 두 사람이다. 작가는 작업의 주체임이 (물리적으로) 분명하지만, 캔버스에 붓이 붙었다 떨어지는 찰나가 지나면 타자가 된다. 그림 속 두 인물은 무심하리만치 제 할 일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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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작업은 따뜻하다. 그리고 무심하다. 그것이 자신을 보온하기 위한 품앗이이든지, 반쯤 뜬 눈으로 시선을 교차하는 방법으로 드러날 뿐이다. 이것은 우리 주변에 하나쯤 있는 친구의 모습이다. 그 친구의 연인의 모습이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다. 그의 그림 속에는 내가, 우리 주변이, 우리 주변의 주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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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표현 방식은 지난 전시를 거쳐 진화했다. 지난 작업들에선 검은 선으로, 형태를 중심에 두고 주제를 전개해 나갔다면, 이번에는 그 강렬한 선에 색을 추가하고, 뜬금없이 정물이 커지는 등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에 차원을 높였다. 위의 작품은 검은 선 위에 붉은 선으로 인물을 덧칠하여 완성했다. 때문에 인물은 배경에 사용된 붉은색보다 더욱더 깊은 색의 붉은 형태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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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단순한 선과 명암 형태의 작업이다. 그러나 우리가 타인에 갖는 관심 수준이 딱 이 정도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타자를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는다.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람을 인상으로 기억한다. 나와 만났던 그 순간에 그(또는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찰나의 순간 감은 눈 그 속에는 무슨 색깔의 마음이 퍼져 나오는지, 그 순간 대상은 어떤 각도로 손가락, 발가락을 구부렸는지. 우리는 일상 속 타자를 그렇게 인상이라 부르는 틀 위에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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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차원 올라간 그의 표현 스펙트럼은 일상(normal life)이라는 주제 위에 계속해서 퇴적되고 있다. 작가는 우리의 삶. 그러니까 이 글을 읽는 당신과, 글을 쓰는 내 삶, 그리고 작가 자신의 삶을 그린다. 모두가 이입할 수 있는 최적의 상황과 최적의 표정. 그리고 그 기분을 드러낼 수 있는 최적의 색과 형태를 찾기 위해 고뇌한다.

그가 그린 우리의 모습이 더 보고 싶다. 2층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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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업은 입구에서부터 본격적이다. 우리의 모습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어떤 이는 모딜리아니스럽다며 큐레이터에게 말을 붙이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림 앞에서 그것과 같은 포즈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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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그림 앞에서 그림과 같은 포즈를 취한다. 그 순간 작업은 포즈를 취한 이의 것이 된다.

김희수 작가는 다작한다. 그는 남다른 열등감으로 작업을 하는 작가다. 미술을 늦게 시작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중과 평단에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늦게 시작한 미술 때문에 그의 길이 멀었다는 것이 아니다. 늦은 시작은 누구보다 자신의 작업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그가 기존에 이루어 놓은 자신의 안락한 생애를 작업에 집어던질 수 있을 만큼 간절하다는 의미다. 그리고 현대의 작업은 ‘따라갈’ 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길은 자신의 것이며, 누가 오랫동안, 그리고 열심히 그 길을 닦고 걸었느냐의 문제다. 늦은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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빽빽이 들어선 그의 에스키스와 자전적인 그의 다짐 글이 존재하는 방은 그가 작업하는 길이 정도(正道) 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소다. 감상자들은 모두 그의 정신세계가 지난 길을 탐색 (혹은 탐닉)할 수 있다. 감상자는 그의 뱃속에서 작가가 얼마나 작업에 갈증을 느끼고 있는지, 어떤 방향으로 진화했고, 어느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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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이전에 많은 이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수 없이 많은 장면으로 분할된 우리의 일상이다. 아름답고 무심한 우리들의 모습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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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그 만큼 깊이가 깊다.”

“for your c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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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를 했을 때 느끼는 행복.”

“비우고 버리는 것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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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예민한 사람이다.”

마치 우리의 일기를 보는 듯, 작가의 일기를 훔쳐 보는 듯 흥미롭고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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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것을 반복하는 행위에 대한 두려움.”

그의 작업이 진화할 수 있는 반석이 언어로 선언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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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주제엔 인물과 식물이 자주 등장한다. 둘 다 현재 살아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그리스 신화의 님프(nymph)처럼 자신의 식물이 시들면 죽는 존재라는 의미인 걸까. 아니면 다프네의 나무처럼 달아나다 못해 승화한 존재가 식물로서 드러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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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씩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을 주시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를테면 일면식  없는 사람들과 어깨를 맞대고 한참을 흔들리고 앉아 있어야 하는 버스나 지하철에 올랐을 때라던지, 식당이나 카페, 병원과 같은 장소에 있을 때 특히 그러하다. 보통 대화를 나누거나 휴대폰이나 책자를 들여다보거나 무난한 빈 구석 어디쯤 시선을 걸쳐 놓고 멍하니 있기도 한다. 공공 장소라는 한계 속에서도 각자 나름의 시간을 오만 가지 방법으로 사용한다. 과연 나와 같은 곳에 존재하는 사람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게 하는 모습도 있는가 하는 반면에, 그들 속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김희수 작가는 일상에 주의를 기울인다. 자신의 일상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아까 봤던 작은 벌레, 아버지와 나누었던 소소한 대화, 깊이 스며드는 어떤 감정, 당장 내일 엎어질지도 모를 크고 작은 다짐들까지. 작업 소재는 사물이 될 때도 있지만 주를 이루는 것은 단연 인물이다. 무심해 보이는 거친 선으로 인물의 섬세한 감정을 담아낸다. 터져 나오는 환희 라던지 무너져 내리는 절망 같이 무언가가 극적으로 표출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부각되어 그려지는 그 얼굴에는 표정도 없다. 더하여 속 마음이 내비친다는 인물의 눈은 대부분 반쯤 감겨 있거나 아주 감겨 있다. 그들의 감정을 손쉽게 어느 이모티콘 하나를 찍어 대변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정적이고 차분해 보이는 그들을 종일 노려본다 해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낼 수가 없을 것만 같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작가 시선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도이다.

김희수는 다작하는 작가로 그의 공간에 들어서면 엄청난 양의 드로잉과 페인팅 작업들에 둘러싸이게 된다. 벽면과 바닥을 가득히 덮은 수십 명의 얼굴과 몸짓. 그러나 여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소란스러움이 아닌 평안과 고요함이다. 아예 소리가 없는 것보다 오히려 편안함을 주는 적당한 잡음, 다양한 음높이의 소리가 모여 이루어진 백색소음 같이.

동시대를 살고 있는 나의, 평범한 보통의 일상이다.

큐레이터 심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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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청춘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모르고 지나간 것’이라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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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페인팅 작업 또한 많다. 단순해 보이는 작업이지만, 쉽게 완성된 것은 없다. 작가는 눈의 위치, 코의 각도, 입의 모양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작업을 다시 한다. 선이 단순한 만큼 전해야 하는 감정은 명확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그는 머릿속 인물의 표정, 인물의 감정, 우리의 일상이 캔버스에 들어가 있지 않다 느끼는 결과를 용인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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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용 이젤 위 에스키스(위)와 그것이 페인팅으로 드러난 작업(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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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작업실은 양수리에 있다. 이번 전시에선 그의 작업과 함께 그의 작업실이 함께 왔다. 카펫은 그의 작업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업 도구다. 그는 이 위에서 많은 대상을 스케치하고, 에스키스했으며, 작업 일지를 적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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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딱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보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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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일상 작업 중 새로운 실험이 도드라진 작품.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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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윗 작업이 좋다. 작업은 사물 위에 인물을 투영하고, 그 외 정물들을 병치했다. 우리는 물건을 통해 그 주인의 성격을 예측하기도 한다. 그가 새로운 방법으로 감상자들을 일상에 초대했다. 시도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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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카펫은 그가 연남동 작업실에 있을 때 본 기억이 있다. 그는 이 위에서 커피를 마셨을 테고, 작품에 대하여 고민하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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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기존에 알던 색의 명암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윗 작품을 보자. 그녀는 어스름 앞에 있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머리 위로 보랏빛 명암이 쏟아진다. 작품 속 인물은 턱을 괴고 눈을 감는다. 머리 위로 꽃이 자라 그녀를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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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수 없는 실험을 감행한다. 그 실험의 장소가 자신의 품위와 어울리는가는 중요치 않다. 그가 오로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작업이다. 그 표현이 드러날 수 있는 캔버스가 존재한다면, 그것의 재질이나 본래 용도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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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리인지 연남동인지 모를 곳에서. 작가는 바닥 차가운 저 의자가 자신의 체온과 같아질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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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작업도 좋았다.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곳에 의자는 올라가 있다. 여성은 의자의 존재와 관련 없이 자신을 위한 휴식을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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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현재와 두 존재. 두 가지 현시가 앞 뒤로 배치되어 있다. 사진에선 짐작키 어렵겠지만 큰 크기의 작품이다. 커다란 캔버스에 완성된 메시지는 더욱 확장된 성대로 목소리를 퍼뜨린다. 그 소리가 애절하게 다가와 오래도록 작품 앞을 떠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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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책상. 작업을 위한 최소한의 도구들만 그 위에 남았다. 필요 없지만 우리를 윤택하게 해 주는 것들은 모두 퇴화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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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하루종일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지금 나는 매우 불만인 상태이며 나 스스로에게 매우 화가 나 있는 상태이다. 무엇이 좋은지에 대한 질문이 나를 매우 속쓰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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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좋은가?

안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좋은가?

아무튼 후회하려면 일단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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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작가의 뒷 모습

그의 작품이 한데 모여 공진하는 공간. 그 공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하마터면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우리의 일상이 이렇게 무심한 듯 아름다웠는지, 단순한 듯 이리도 묵직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는지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삶은 답 없는 질문이다. 그러나 그 질문의 답이 명백한 ‘답 없음’ 일 지라도 한 번이라도 이것에 대하여 고뇌한 이는 그렇지 않은 이와 다른 결의 소리를 낸다. 그의 작업 앞에서 한 없이 단순해질 수 있는 이유도, 뜻 모르게 심각해질 수 있는 연유도 이 곳에 있다. 하얀 종이를 두고 무엇이 앞/뒤 인지 분간할 수 없듯, 우리가 드러내는 일상의 결은 어느 방향이든 간에 양쪽 면을 동시에 지닌다. 그리고 한 면이 드러나는 순간, 다른 한쪽 면은 그 앞을 반투명하게 투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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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을 인상으로 기억하고, 그것을 내면에서 부화시킨다.

일상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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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라는 이름을 바꾸어 불러도 향기는 그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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