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마다. 오랜만이다. 요새는 비가 내려도 반나절, 짧게는 몇 시간이었는데. 뉴스는 이 비가 제법 길거라 했다. 장마에 맞춰 휴가가 났다. 정확힌 주어졌다 표현하는 것이 옳겠다. 부서가 해체됐다. 나와 팀원들이 한숨에 누가 더 멀리 뛰는지 경쟁하듯 나던 곳. 반쯤 감긴 눈으로 옥상에 올라 담배 한 개비 비벼 끄던 그곳. 그곳은 이제 다른 공간이 될 것이다. 몇은 협력회사로, 몇은 다른 부서로 간다고 했다. 나는 어찌 되지 못했다. 팀장은 나의 어깨를 쥐어짜며 힘써보겠다 말했다. 그는 그가 힘을 쓰는 동안 시간을 조금 갖는 게 어떠냐고 했다.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시간이 났다.

해가 중천임에도 비는 여전하다. 반쯤 환한 날씨와 떨어지는 비, 그리고 서울 버스 정류장은 생경하다. 이 곳을 지날 때는 발 디딜 틈 없는 퇴근 버스 속, 혹은 외롭게 밟는 택시 안 이었다. 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구나 하다가, “구미행 버스 한 장이요. 아니요, 편도입니다.”했다. 두꺼운 물색 버스표 한 장으로 고향 풍경을 샀다. 고향으로 가는 버스 창에도 투둑 투둑 빗방울이 나렸다. 이것으로 나는 외롭진 않겠구나. 이어폰을 뽑아 내리고 숨을 한 번 쉬었다.

정류장에도 비는 여전했다. 곧장 집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이네.” 엄마가 맞았다. 엄마는 벌써 주름이 네 줄이다. 그녀는 유리가 올라간 나무 식탁 위로 대강 따뜻한 장국을 탁 올렸다.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말없이 그것을 긁어먹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납골 재납부 기일이 왔다고 했다. 그녀에게 이번 달 돈을 더 넣겠다 약속했다. 나의 아버지. 그는 간암으로 일찍 세상을 떴다. 나의 등과 눈썹 아래에 그가 남긴 흔적이 있다. 그는 그의 피조물인 나의 존재가 미심쩍었는지, 자신의 흔적을 나와 엄마의 몸. 이곳저곳에 남겼다. 그 숭고한 의식을 위해선 술이 필요했다.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필요했다. 술은 머잖아 그의 한계를 넘었다. 그와 동시에 존재는 추락한 무당처럼 하나 둘 기능을 상실했다. 그렇게 강하던 그가 마른 나뭇가지처럼 세상 위로 바스러졌다. 그래도 너의 아빠야. 그녀는 내게 말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 말했다. 그래도 나의 아빠다. 우리는 그를 그렇게 회상했다. 추적대는 빗방울은 이제 그 알이 조금 도톰하다.

엄마는 일찍 잠에 들었다. 손을 가지런히 포개고 새우잠을 자는 모습 위로 손톱 두께의 이불을 펴 얹었다. 그녀가 누운 자리 주변으로 노란색 장판이 올록하다. 나는 그녀를 등졌다. 거리에 나와 A를 만났다. A는 나의 친구. 그는 공무원 준비가 몇 해다. 그는 그 짓이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술자리에도 태연하다. 우리는 주황색 천막을 걷고,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 위에 몸을 올렸다. 우리들 앞으로 검은 홍합 알과 소주가 탁탁 올랐다. A는 내 안부를 물었다. 나는 휴가를 받았다 했다. 그는 소주를 따르던 주둥이와 내 표정을 두어 번 번갈아 보았다. 꼴꼴꼴. 나는 차오른 그것을 말없이 받아 천천히 밀어 넘겼다. 머리 위에 펼쳐진 포장마차 천막에 비는 토독토독 존재를 알렸다. A는 이제 자신의 안부를 말했다. 진짜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번엔 될 것 같다. 정말로 그런 기분이 든다고 했다. 나는 그가 도장처럼 찍어 내린 소주병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잔 위로 기울였다. 꼴꼴꼴.

우리는 천천히, 많이도 마셨다. 나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인 우산을 주웠다. A는 그 사이 계산을 한다고 몸뚱이를 젖혔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나는 그를 돌려 잡았다. 그가 나의 손을 뿌리쳤다. 그의 눈 아래, 두 마디 정도 크기로 빨간 홍조가 올랐다. “비가 와서 그래 비가.” 그가 말했다. A는 자신의 주머니를 크게 휘적대다 충분히 구겨진 지폐 몇 장을 찾았고,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A. 그리 활달하던 녀석은 기가 다 죽었다. 그래도 나를 뿌리치던 손 끝자락엔 힘이 조금 남아 다행이다. 비는 이제 우리의 의지처럼 맥박이 흐릿하게 떨어지고 있다. 나와 A는 주황빛 축복을 받으며 골목을 돌고, 돌계단을 올랐다. 다시 집. 그리고 오랜만에 찾은 나의 방.

비었던 방엔 오랜만에 든 사람이 더 휑하다. 냉기가 돌았다. 그러나 나는 푹 고아 오른 취기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대로 창틀에 몸을 끼워 앉았다. 반투명 창문 위로 커다랗게 주황색 별이 떴다. 창문을 조금 걷었다. 별은 가로등이다. 차가운 빗방울이 창틀에 튕겨 손등을 때렸다. 예민해진 감각에 손등이 살짝 오그라들었다. 고개를 빼어 창 밖을 밀어 본다. 가로등은 이제 달 같다. 살살 느껴지는 한기와 빗소리가 덤덤하니 위로다. 나는 취기가 조금 가실까 싶어 술냄새 나는 입김이 사그라들 정도의 시간만큼 그곳에 앉았다.

달이 지듯 등이 꺼졌다. 흐물대던 빗방울이 이제는 소리만 남았다. 여명은 어느새 자줏빛 물결을 이었다. 나는 부쩍 차가워진 몸에 부르르 떨었다. 부엌으로 가 커피 믹스 모가지를 땄다. 혹시 엄마가 깨진 않을까, 살살 주전자를 올렸다. 그대로 싱크 위에 두 팔을 A자로 얹었다. 잠깐 고개를 숙인다. 시간이 조금 지난듯 싶다. 그 사이 펄펄 끓는 수증기는 주전자 주둥이를 나오지 못해 비명이다. 그리고 이제는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비명 때문인지, 휴가의 끝인지 모르게 몽롱하다.

소고단편선, <장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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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

장미라는 이름을 바꾸어 불러도 향기는 그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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