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나기

월이 흐르면 무언가를 대가 없이 좋아하기가 힘들어진다. 바라는 게 많은 건 아니지만, 기대하는 마음이 생긴다. 바람은 언젠가부터 마음 한 켠, 자연스럽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다. 조건 없이 사랑하고, 퍼줬었다. 그러나 열정은 타오르는 화마(火魔)만큼 망각이 활발하던 지난날의 것이었다. 요즘엔 육체가 노화하듯 정신적 체력도 달림을 느낀다.

어제는 한없이 마음에 들었던 한 배우의 미소가, 지하철에서 곁눈질했던 어떤 사람의 인간미 넘치는 졸음이 오늘이 되면 지루하고 식상하게 느껴진다. TV와 인터넷은 클릭 한 번만에 새로운 것들을 쏟아낸다. 사람의 더운 냄새는 훈훈하지만 다음날에는 똑 누린내가 나는 것 같다. 나는 매너리즘으로부터 달아난다. 화면을 계속해서 새로고침 하고, 새로운 어떤 것을 집어삼키며 더욱더 신선한 자극을 찾는다.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계산한다. 한결같음을 추구하기보다는 지루함을 달래 줄 놀잇감을 찾는다.

익숙한 것은 편안하지만 절어 산다는 감각을 동시에 내포한다. 나는 이런 이중성이 싫었고, 질척되는 것에 싫증을 느낀다. 상대의 이야기를 오래 들어주는 것도, 나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도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굳이 그렇게 지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날이 있다. 그럴 때 나는 도망친다.

“띠 띠 띠 띠, 띠 띠 띠 띠….”

새벽 여섯 시 반, 이젠 싫어도 알아서 잠에서 깬다. 스트레칭 몇 번에 머리는 팽팽 돈다. 잠시 어젯밤 꿈속의 나를 더듬었다. 사냥감만 보이는 듯 내달음치던 사냥개 같은 나는 어디에 있는가. 새벽빛 거울 앞에 선 한 사람은 축 처져있고, 세상에 절어있다. 어젯밤 숙면에 피로는 고이 벗어놓고 일어난 줄 알았는데. 어느새 녀석은 발 끝에 채여 해초처럼 감겨 있다.

더운물을 틀었다. 샤워기 머리에서 쏟아지는 자극에 입은 절로 벌어진다. 피부 위로 바늘이 쏟아지는 것만 같다. 나는 천장으로 피어오르는 더운 증기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선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잠시 어제를 회상했다.

“우리, 결혼하자.” 네가 말했다.

너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긴, 우리 둘 다 그럴 나이긴 했다. 우리는 몇 년을 만났고, 함께 여행도 다녀왔으며, 너는 내게 등을 보이길 수십 회 허락했다. 나와 너의 친구들 모두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우리는 결혼을 발표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제는 어떤 말도 쉬이 나오지 않았다. 굳었던 얼굴의 너는 이내 힘을 풀었다. 마치 자기가 너무 진지했다는 듯, 너는 멋쩍게 바람을 빼며 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출근길 지하철에 있었다. 여기, 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웃는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출근길  지하철만큼 어색하고 잿빛인 곳도 없으리라. 발 디딜 곳 하나 없이 빽빽한 이곳에 소리라곤 콜록대는 소리, 그리고 코 마시는 소리뿐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너의 얼굴을 그렸다.

우리는 밤이슬을 맞고 있었다. 우리 둘 사이의 공간은 얼마 안 되는 것 같은데. 그 사이엔 우주가 흐르고 있었다. 네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는 뭐 하나 제대로 갖춘 게 없는 사람이다. 집은 내 것이 아니고, 가지고 있는 것들도 세 차례, 아니면 여섯 회로 나누어 무이자로 소유권을 구매하는 중이었다. 차를 산다는 것은 꿈을 꿀 수도 없었고, 다달이 부모님께 드리는 돈까지 합하면 너와 만나는 것이 아주 가끔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 조차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네가 내 것이 아님은 물으나 마나 한 것이다. 나는 너와 있으면 행복했다. 그러나 나는 네게 어떠한 소유권도 주장하지 못했다. 이런 내가 결혼이라니. 나에게 가당키나 한 소릴까 생각하다 말문이 막혔다.

다행히 오늘 회사는 별로 바쁘지 않았다. 내 앞으로 떨어진 일이 하나 있긴 했지만 단순한 작업이었다. 마치 오늘은 너와 그 일을 생각하라고 하늘이 점지해준 날 같다. 나는 점심이고, 저녁이고 너를 생각했다.

어제 너는 가만히 고개를 떨구고 있었고, 나는 그런 너의 정수리 언저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오랜 침묵을 깨고 너는 말했다.

“왜?”라고.

나는 여러 가지 말이 서로를 비집고  빠져나오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너무 많은 말들이 한꺼번에 나오려는 탓에 내 입은 벙어리마냥 달싹거릴 뿐 이었다. 침묵의 공기는 아까보다 더욱 무거워졌다. 어느새 공기 소리는 폭포 마냥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런데 나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들이쳤다.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서로를 볼 수 있었던 건, 우리가 한 집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다른 대문을 통해 서로를 만났기 때문은 아닐까. 혹시 우리가 한 집에서 살게 된다면 사랑의 균형이 깨지는 것은 아닐까. 사랑과 삶은 엄연히 다를 테니 말이다.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하고 있었고, 시곗바늘, 초침 하나에 동료들은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어쩐지 오늘 휴대폰은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간단한 안부 하나라도 주고받던 우리였는데, 오늘 내 휴대폰은 하루 종일 짙은 검은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언젠가 네가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아마도 우리가 행복했던 날들 중 하루였을 것이다.

“그거 알아? 앤디 워홀의 여자친구가 에디 세즈윅인데, 언젠가 앤디 워홀에게 잔뜩 화가 나서 이런 말을 해.”

진짜 나쁜 남자는 자기가 한 여자를 어떻게  드라이브하는지 조차 모르는 놈이야.
네가 그래. 현재 그 이상의 것을 보느라 현재를 챙겨주지 못하고 있어.

라고. 이어서 너는 가끔 내가 앤디 워홀 같을 때가 있다고 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온전히 행복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 같다고. 너무 그러지 말라며, 너는 내게 활짝 미소 지었다.

회상을 멈췄을 때, 나는 집에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타올로 젖은 몸을 닦아내고 있었다. 휴대폰은 여전히 검었다. 너와 나누었던 기억의 편린(片鱗)이 이렇게나 다른 표정으로 내 앞에 나타날 줄이야. 나는 너를 지금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어제의 침묵은 네 멱살을 잡고 한 없이 깊고 어두운 불안의 구덩텅이로 끌고 들어가는 것 같았을 것이다. 나는 타올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는 침대에 몸을 쑤셔 넣었다.

휴대폰을 켰다. 소셜미디어에 들어갔다. 내 타임라인은 어쭙잖은 유머와 광고글로 도배되어 있었다. 일 년 전만 하더라도 누가누가 행복한지 경진대회를 하는 것 같은 공간이었는데, 그 많던 행복 뽐냄이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나는 소셜미디어를 끄고 네 전화번호를 찍었다. 몸은 점점 피곤해져 가고 있었다. 나는 통화 버튼 위로 엄지 손가락을 젓고 있었다.

나는 네게 전화를 걸려고 하다가 다시 소셜미디어를 켰다. 내 계정을 지워버렸다. 눈을 감았다. 정신은 너와 피로 사이에서 점점 빛을 잃고 있었다. 나는 빛이 사라지도록 내버려 뒀다. 오늘은 피로가 좀 가시길 바라면서. 그렇게 나는 달아나고 있었다.

소고 단편선, <달아나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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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

장미라는 이름을 바꾸어 불러도 향기는 그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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