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추억

나는 이따금 한량처럼(타자의 시선엔 아저씨처럼), 유년기를 반추할 때가 있다. 그중 아직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장면이 몇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우리 집에 컴퓨터를 처음 들이던 날에 대한 기억이다.

시기는 94년 겨울. 예전 겨울은 요즘의 그것보다 해가 빨리 졌고, 어둠은 더욱 짙었다. 문 틈 새로 찬 바람이 살살 치던 저녁, 아버지께서 커다란 박스 하나를 들고 오셨다. 박스는 어찌나 큰지 현관문을 열어 두고 아빠가 먼저 들어온 다음, 박스 뒤편에 있는 플라스틱 노끈을 이용해 기울여 끌어야 할 정도였다. 나와 동생은 내복을 입고 있었는데, 열린 문 새로 들어오는 찬 바람에 온 몸을 베베 꼬면서도 난생처음 보는 규모의 그것의 정체가 궁금해 현관을 떠나지 못했다. 아빠는 그런 우리를 앞에 두고, “아들, 딸아. 이건 컴퓨터라는 건데, 200만 원 짜리야”하며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지금이야 초고가 가전제품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지만, 당시 기백만원을 호가하는 가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억하기로, 아버지는 그것을 배송시키는 대신, 퇴근길에 본인이 직접 상자째 들고 오셨다. 현관까지 그것을 끌어놓은 아버지의 표정은 밝게 상기되어 있어서, 과장컨데 선생님께 자랑할 최적의 시기를 기다리는 청소년 같아 보였다. 돌아보면 그 표정 일란 가족을 사랑하는 가장의 순수한 얼굴이며, 직접 들인 컴퓨터는 사랑의 표시가 물리적으로 형태를 드러낸 것이리라. 어찌 됐건 94년 겨울, 우리 집엔 처음으로 컴퓨터가 들었다.

요즘이야 각지고 커다란 컴퓨터 디자인이 우스워보이겠지만, 일곱 살 배기인 내게 486 컴퓨터는 고등학교 형/누나의 양장본 도서처럼 범접할 수 없는 성서처럼 느껴졌다. 아빠는 그것을 가족 누구나 쓸 수 있게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함부로 건드릴만한 용기가 쉽게 나지 않았다. 대신 나는 아빠가 하는 작업을 지켜보곤 했는데, 그가 굽은 등과 검지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작업을 하는 동안 컴퓨터는 입력마다 “위이이잉”하는 소리를 내며 힘차게 팬을 돌렸다. 그것은 다른 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는 나를 부르는 음악이었다. 나는 컴퓨터 소리가 나면 풀고 있던 학습지를 자리에 던져버리고 사이렌의 노랫소리에 홀리듯 컴퓨터 방으로 뛰어들었다. 그 모습은 7살의 품위치곤 깨나 잡스러워서, 뜀박질마다 발바닥이 장판에 붙어 찰싹-찰싹 소리가 났다. 누군가 그것을 들었다면, 흡사 매 맞는 소리 같다 할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뛰어서 문지방에 올라 가만히 기대어 있으면, 아버지는 나를 보고 한 번씩 말없이 웃어 주셨다. 그리고는 다시 키보드와 모니터, 그리고 컴퓨터 책자를 번갈아 보며 업무에 몰두하셨다.​

삼십 분쯤 지나 아빠의 작업이 끝나고 그것이 툭 소리를 내고 휴면에 들어갈 때면, 나는 귓가에 맴도는 백색 소음과 끝도 없이 새카만 유리 패널을 바라보면서 멍하니 자리를 지켰다. 당시 컴퓨터는 분위기만으로도 신성한 어떤 부분이 있었다. 흑진주 빛으로 반짝이는 유리 액정은 스테인드글라스 같아 신비로웠다. 프로세스가 처리되는 동안 깜빡이는 LED 불빛은 기계 문물과 인간이 교감하는 물리적 표식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컴퓨터를 켜고, 끄는 시간마다 검은 사제였고, 그 사제는 내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전원이 꺼진 컴퓨터 모니터엔 새까만 흑색 화면만 남았는데, 그것은 표면에 먼지 하나가 없었고, 형광등 빛을 미끈하게 전반사했기 때문에 나는 그 순간 꼭 보석상에 처음 들어간 기분이었다.

아빠는 가끔 출장을 가셨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도둑처럼 문고리를 돌려서 컴퓨터 방에 들어가서 그것의 자태를 훔쳐보곤 했다. 깨물면 부드럽게 흩어질 것 같은 크림색 본체와, 머리가 길게 뒤로 뻗은 CRT 모니터. 나는 커다란 그것을 감상하면서 상상하던 미래 세계에 가까이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내게 486 컴퓨터는 미래 디지털 세계와 현재를 이어주는 가교였다. 나는 아빠에게 차근차근 컴퓨터를 배웠다. 그러다 다른 것들을 하나씩 익혔는데, 그중 게임을 켜고 끄는 법을 알기 시작하면서는 ‘컴퓨터 방 통행금지’ 시간이 생겼다.

[1] 1997년, 방배동. 여름방학
[1] 1997년, 방배동. 여름방학

언제부턴가 나는 부모님이 집을 비우는 시간만을 기다리는 아이가 됐다. 몰래 컴퓨터를 하다가 급하게 끈 전원 때문에 두어 번 메인 보드를 해먹기도 했다. 혼도 많이 났다. 그것은 수리비가 제법 적지 않아서, 엄마는 아빠와 단 둘이 있을 때 작은 소리로 “저 애물단지를 치워버리는 게 어떠냐”라고 상의하기도 했다. 합의는 뜻대로 잘 이뤄지지 않았던 것 같다. 컴퓨터는 사라지는 일 없이, 고장과 수리의 사이클을 반복하며 나의 곁을 지켰다. 덕분에 나는 또래보다 일찍 컴퓨터에 익숙해질 수 있었고, 컴퓨터를 사용하는데 주저함이 없게 됐다. 그 사이 486 프로세서는 586으로 이름이 바뀌어 올라갔다. 이제 나는 도스(MS-DOS)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플로피 디스크로 <포켓몬스터>의 블루, 레드, 혹은 피카츄(옐로우) 버전 게임을 돌려쓰며 학원에 시달린 정신을 달랬다. 도스는 머잖아 윈도우스라는 그래픽 기반 운영 체제로 바뀌었다. 나는 그것으로 모뎀 세대를 보냈다. 인터넷의 등장은 물리적 확장과는 다른 정신적 개방감을 선사했다. 머잖아 피시방이라는 공간이 비 온 뒤 죽순 자라듯 등장했고, 오락실/당구장을 밀어냈다. 테크노 음악은 디지털 풍요 시대의 흥을 돋웠다. 머드게임이 나왔고, 어른들은 열광했다. 아이들은 학원을 마치고 피시방으로 모였다. 시기가 이쯤 되자, 컴퓨터는 우리 또래의 확고한 놀이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1] 1998년, 미도파 앞

컴퓨터는 놀이뿐만 아니라 교육 수단으로 빠르게 흡수됐다. 나는 01년도에 친구와 함께 ‘검색 경진대회’에 나갔다. 대회는 <명왕성을 최초로 관측한 인공위성의 이름은?>이나 <별 가운데 밝기가 달라지는 별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같은 질문에 답을 적는 것이었다. 초등학생이 상식 수준에서 답하기 어려운 것들을 검색 기술을 익혀 해결하도록 장려하는 취지였다. 당시 나와 친구 둘은 ‘통합 검색 사이트’라고 하여 한 검색엔진에다 검색어를 입력하면, 구글, 야후, 네이버, 다음, 엠파스, 한미르, 라이코스 등지의 결과물을 한꺼번에 받아 볼 수 있는 사이트를 비기(?)로 준비했는데, 이것은 검색 결과의 양이 아니라 품질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짓이었다. 우리는 보기 좋게 문제를 거의 풀지 못했고, 교내외 모든 분야의 경진대회를 싹쓸이하던 경력에 반해 빈손으로 교문을 나섰다. 우리는 그날의 치욕을 피시방에서 환타 한 캔을 더 시키는 것으로 해소했다.

지금도 서비스 중인 통합 검색 사이트. 이것에 의존도가 높았던 본인과 친구들은 검색 경진 대회에서 인생의 쓴 맛을 느꼈다

나는 컴퓨터와 함께 성장했다. 나는 학생일 때 공부했고, 사춘기라 불릴 때 방황했다. 컴퓨터는 정보 연결자로서 순기능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노란 국물>로 시작된 <엽기 사이트>나, 해적 파일을 다운로드할 수 있는 <와래즈>라는 이름으로 음지의 것을 공유하는 역할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컴퓨터는 중간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아빠에게 컴퓨터는 회계 및 뉴스 자료를 보는 창구였다. 엄마가 앞에 앉았을 때, 그것은 출력을 도왔다. 나와 내 친구들에게 컴퓨터는 (주로) 게임기였다. 나는 <스타크래프트>는 잘 못했고, <디아블로 2>에선 ‘시체 폭발’로 아이템을 모두 날려먹었으며, 한 머드게임을 하다가 30 만원이 두 달에 걸쳐 과금되는 바람에 집에서 쫓겨날 뻔한 소년기를 보냈다. 꼭 게임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2000년대는 ‘한메일’과 ‘미니홈피’가 유행이었는데, 지금도 기억하는 ‘해피 바이러스 00’이라는 한메일 계정에는 한창 좋아했던 소녀와 주고받던 몇 줄짜리 이메일이 남아 있고, 싸이월드 미니홈피에는 첫사랑과 짧게 나눴던 방명록이 숨겨놓은 보물 쪽지처럼 대롱대롱 달려 있다. 그때의 인연은 한 번의 전학과 사랑(과 사람 둘 다)에 미숙한 나의 태도 때문에 한참 전에 끊어졌지만 모든 기억들과 기록은 보물처럼 소중하게 가슴에 남아 있다.

​​

[1] 1997년, 사당동

요즘 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혹은 데이터 엔지니어라고 불리는 직업으로 살고 있다. 일찍이 프로그래밍 경진 대회를 다니며 영재-재능을 뽐내거나, 소셜미디어에 회자되는 유명 개발자는 아니지만 나는 여전히 컴퓨터를 사용하는데 주저함이 없고, TV보다 (인터넷이 되는) 컴퓨터를 선호하는 세대의 사람이 됐다. 부모님은 여전히 TV 세대를 살고 계신다. 부모님 세대에게 TV란, 인치 수에 따라 가정의 여유를 보여주는 징표 같은 것으로 보인다. 내가 만난 보통의 서민 어른들은 서로의 집을 방문하고 대홧거리가 다 떨어지면 TV를 함께 본다. 자식 자랑, 경제 걱정, 나라 걱정 등으로 세상사 한 바투 토론이 끝나면, 그들은 이 집 TV 화질이 좋네, 어디꺼네 하는 이야기로 남은 시간을 보낸다. 내 또래 남자들은 컴퓨터 사양을 물으며 시간을 보낸다. 그래픽 카드는 무엇인지, 하드는 몇 테라인지, 무슨 게임이 돌아가는지를 확인하고, 감탄한다. 이것은 유물적 대상이 바뀌었다 뿐이지 과거나 지금이나 모두 다 같은 생인 듯하다.

아무 말 대잔치인 컴퓨터 회상이 거의 끝나 간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故 피터 세이모어 호프만은 인터뷰어가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이유>를 묻자, ‘뇌가 새로운 기억을 채울 공간이 부족해, 과거의 그것을 압축/삭제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반추를 하고 나니 보낸 시간은 참으로 짧다.

근래 나는 컴퓨터로 일하는 시간을 제하곤 친구들의 안부를 묻거나 멀리 떨어진 친구와 페이스타임을 하며 그것을 활용한다. 평소에 생을 (공개적인) 글로 반추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오늘이 특별히 기록으로 남은 이유가 있다면, 한 잔 마신 맥주의 화학반응과 순수했던 과거의 나를 박물관처럼 바라보는 감응이 만나 헛헛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친구를 하나 불러 주저리 떠들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기 때문이고, 달랠 길 없는 어린 자신을 어르고 싶어서다.​

[2] 2000년대 울산 초등학교, 울산 중구 문화원

익숙한 것/ 절어 있던 것에서 자연스럽게 분리된 다음, 그것을 순차대로 하나씩 곱씹어보면, 옛 것이라 불리는 대상의 새로운 맛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요즘 음식처럼 풍미 있고 세련된 맛은 아닐지라도, 속에서는 오래 씹은 감초처럼 지근한 맛이 난다. 나는 어쩌면 이것이 삶의 맛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이유인즉 우리는 지금 너무 바쁘고, 무엇이 어떻게 바뀌는지 모르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열심히 숨을 쉬는 것. 그것이 나중에 곱씹을 여남은 생을 맛을 더욱 감질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을 두 번 살 수 있는 게 아니기에. 그때, 그리고 지금 우리는 참으로 철없고 소중하다.

컴퓨터가 만들어 준 소중한 추억. 돌아보면 그것들은 흑역사라 불릴만한 것들이 많다. 돌리고 싶은 행동도 있다. 만약 내가 컴퓨터 방에 뛰어들어가 사각 쇳덩이를 나긋하게 바라보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혹은 내가 소중하다 생각했던 사람에게 얼음장같이 굴기 전으로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아마도 컴퓨터 앞에 앉아 이 글을 쓰는 나는, 지금 조금 덜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현실은 어떤 것도 돌릴 수 없다. 모 노래 가사처럼 나는 개똥 벌레고,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지금 막, 우리 모두가 개똥벌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을 거스르는 것. 그러니까 이게 신이 인류에게 남긴 지상 최대의 과제로 남은 이유는, 혹시 나뿐 아니라 지상에 함께 있는 이들 역시 같은 과업을 지고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사랑했던 당신의 생애 속에도 돌리고 싶은 자신이 들어 있나? 만약 내가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이것을 당신께 물을 수 있을까? 아니다. 나는 당신을 만나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세상 모든 단어가 나의 입으로 날아들어와 나는 입이 턱 하고 막힐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만약 당신을 만난다면. 그래서 어렸던 날, 미숙한 나의 메시지를 읽어 주었던 맞은편 컴퓨터 속 당신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나는 몇 번의 질문으로 당신과의 추억을 일치시키는 대신 나의 것을 조금 뜯어다가 쿠키처럼 당신 앞에 내어 놓을 것이다.

Fin.


출처

[1] 교과서를 찍은듯한 사진은 2차 출처로, 가져온 곳은 PGR21:
https://pgr21.com/pb/pb.php?id=humor&page=5&divpage=&no=270075

[2] 2000년대 울산 초등학교, 가져온 곳은 울산 중구 문화원:  http://www.munhwa21.org/bbs/view.php?db=pds2&id=8&s_no=8&page=1&key=&ind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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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

장미라는 이름을 바꾸어 불러도 향기는 그대로 남는다

컴퓨터/추억”에 대한 답글 1개

  1. ‘컴퓨터’, ‘추억’ 두가지 키워드가 너무 끌려서,
    그냥 무작정 읽기시작했는데 빠져들어버렸네요.
    저 언저리에 있던 제 추억까지도 다시 앞으로 가져다 주는 글.
    * 중간에 제 고향데빈 울산 사진이 나오길래 나를 위한 글인가? 하는 착각이 들정도 🙂

    Liked by 1명

    1. 고맙습니다 🙂 이것은 고도의 울산 찬양글. 개인적 경험을 공유하다보면 그것이 발화든 경청이든 간에 공통의 경험으로 확장되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제가 데빈의 기억 일부를 함께 보냈다는 생각까지 미치니, 마음이 참 따뜻합니다. ☺️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얼굴 보면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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