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트로이의 여인들 in 행화탕

던 감기가 떨어지듯 휴일도, 계절도 지나간다. 어제 나는 연극을 봤다. ‘미글’이라고 해서 함께 전시를 보고 글을 쓰는 모임이 있다. 회원 중 한 분이 연극을 하신다. 공연 올라가는 날 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미글 이후 가장 빠른 공연이었다. 작업은 행화탕이라는 공간에서 열렸다. 갈 곳이 집에서 멀지 않아서 자전거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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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화탕, 마포구 아현동 613-11

행화탕은 원래 대중 목욕탕이었다. 효용과 땅값의 경제 논리는 대중탕을 밀어냈다. 수순대로라면 상업 건물이 올라갔을 것이다. PD, 전시 기획자, 큐레이터, 건축가 등 열 명이 뜻을 모았다. 이들은 행화탕을 복합 문화공간으로 살렸다. 이제 이 곳은 카페 겸 공연이 가능한 공간이 됐다. 주변으로 사기업, 관공서, 그리고 여의도로 출-퇴근 하는 분들이 사는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건물 숲 속에서 행화탕은 독보적인 단층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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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관 뿐만 아니라 내부도, 컨셉도 실험적이다. 공연 기획을 하던 분들이 재구성한 건물이라 그런지 날것이다. 행화탕은 2016년에 개축했다. 재개발 계획이 잡히면 즉시 철거해야 한다.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 가장 이질적이다. 건물은 언제 죽음이 닥쳐도 이상하지 않은 인물이 매일 최선을 다해 사는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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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올리는 작업이고, 현매 없이 예약으로만 관람이 가능했다. 그래서 관객들은 학교, 극단 중심이었다. 끼리끼리 아는 사람들 속에 나는 혼자다. 주변으로 눈길을 돌렸다. 높은 천정과 나무 지붕, 골조가 눈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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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찍었는지 모르겠는 사진. 아마 카페 이곳저곳을 찍다가 카메라를 옮기면서 셔터가 눌린듯 하다.

입장은 저녁 8시. 얇은 베일 하나를 걷으니 곧장 무대다. 여섯대의 스탠드 스피커에서 피아노 선율이 흘렀다. 배우들은 무대와 객석 주변을 천천히 돌고 있었다. 관객들이 모두 자리하니 오디오가 페이드아웃 됐다. 연극은 그렇게 경계없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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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의 여인들>은 트로이 전쟁을 다룬 삼부작의 세 번째 비극이다. 주인공은 트로이 전쟁에서 패배한 여인들이다. 여인들의 남편은 모두 전쟁으로 죽었다. 자녀들과 자신은 그리스의 노예로 넘어갈 운명이다.

배우들이 표현하는 감정은 분노로 일관적이고, 고전 그리스 연극은 대사가 많다. 자칫하면 관객이 지루해할 수 있는 포멧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배우들은 분노에 다양한 감정을 섞어야 한다. 풍부한 몸짓으로 존재를 각인시키고, 감정에 강세와 약세를 섞어서 관객을 흔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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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업이 실험적이라는 것은 연극 관람 경험이 많지 않은 필자도 느낄 수 있었다. 무대와 관객의 구분이 물리적으로 모호한 공간을 매끄럽게 다듬는 전개, 대기실 모니터를 연극 요소로 끌어온 것, 숄을 사용해서 막을 구분하고, 음성 변조와 서라운드 스피커를 써서 공간감을 물리적 공간에서 확장하려는 시도 등. 재미있는 요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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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와 영역을 막론하고, 배움의 과정에 있는 이들은 ‘학생이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다. 우리는 머리로는 이것을 (아주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을 마음껏 활용한 사례는 만나기 어렵다. 정석만 준수하기도 빠듯한 마감 일정 때문이다. 무연방 <트로이의 여인들>은 자유로웠다. 다소 어수선한 감은 있었으나, 연출을 포함한 일곱 사람이 올리는 연극에 이 정도 기지를 발휘하는 것이 쉽지 않다. 연극은 지혜로웠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았다. 연극 시작부터 끝까지 여섯 배우가 해결하고자 했던 고민을 봤다. 그리고 고민의 치열함을 느꼈다. 원석 예술인을 발견한 기분이다. 영감을 받았다.

좋은 자리에 초대해준 미글 회원님께 감사드린다. 복기를 마친 지금도 여섯 배우의 얼굴을 모두 기억한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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