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답다’는 말은 결국 모순이겠죠

그거 참 너 답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말이다.

‘너 답다’라는 말. 그 속에는 <나의 예상 범위 안에 있는 당신>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어지간히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는 감히 꺼내선 안될 말이다. 필자는 자기다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다. 그보다는 영상이나 다른 읽을거리로 자신을 채우곤 한다. 마치 콜라주 같다. 나를 스스로 구성해 보다 보면 영화의 한 장면이 스크랩되어 등장하기도 하고, 미술 작품의 어떤 부분이 떨어져 나오기도 한다.

요즘 나는 상담을 받는다. 뭔가 정신적 문제가 있다기보다는(있을지도 모른다) 마음속에 불편한 면을 드러내고 직면하고 싶은데, 겁이 나서 도움을 받고 있다. 나 다운 것이 뭘까? 한참 동안이나 필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주제다.

Train, Nigel van Wieck

나를 안다는 것(지기, 知己)은 참 어려운 일이다. 자신을 한계로 내몰지 않으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10km 정도를 쉬지 않고 뛸 수 있지만, 그보다 먼 거리를 뛰게 되면 다음 날 몸에 이상이 생긴다. 혹자는 간접경험으로도 자신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간접경험 만으로 자신을 마주하긴 어렵다고 본다. 마치 한 시간이 넘는 등산을 해 보지도 않고 등반 영화를 평하는 것과 같다. 자신을 잘 안다는 건, (자의든 타의든) 자신을 그만큼 내몰아 봤다는 소리와 같다. 간접경험이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되는 시점은 직접 경험으로 체득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방아쇠를 당길 용기를 북돋아 줄 때다.

그런데 자신을 안다는 건 상당히 불쾌한 일이다. 내몰리는 자신에 대한 연민과 ‘끝까지 가보자’라는 오기를 동시에 품어야 하기 때문이다. 빙빙 도는 찻잔 속의 물처럼 불안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찻잔이 나의 내면이라면 그 물을 돌리는 스틱은 오기다. 오기가 서서히 줄어들 때까지 휘젓는 행위를 멈추어선 안된다. 갑작스레 마음을 닫는 순간, 찻잔에 든 물은 사방으로 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지기(知己)에 도전한다는 건, 자신이 튀어 나갈 수도 있다는 것을 대비하고 또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맞은편에 있는 상대에게 한 번쯤은 물을 튀겨 본 경험이 있다.

Without Even Looking, Nigel van Wieck

인고의 과정 끝에 세상의 끝, 다시 말해 자신의 벽을 만났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가 ‘벽을 아는 사람’이 됐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자신의 한계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번에는 새로운 종류의 불쾌감이 우리 마음속을 휘젓는단 걸 머지않아 느끼게 될 것이다. 나는 이제 <벽>을 알고 있는 존재가 됐지만 비슷한 유형의 사건이 다가오면 지레 포기하는 존재도 됐다. ‘그래,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이게 나지 뭐’하는 생각이 든다. 속은 편할 것이다. 더 이상 그 일 때문에 고민하며 골머리를 썩는 일은 없을 테다. 그런데 전과 다를 바 없는 자신이 괜히 밉다. 젖은 솜 같은 무력감이 나의 손 끝, 발 끝을 회색으로 물들인다.

1988 Alex Reid & Lefevre, Nigel van Wieck

그래서 생각했던 거다. ‘나 다운’게 뭔지.

그런데 나 답다 생각하는 건 정말 답이 없다. (어떤 이슈에 대해서) 선택을 하는 것도 나이고, 심지어 선택을 하지 않아도, 가만히 있어도 그 주체는 나 자신이다. 어떤 사건을 극복하기 위해서 도전을 한다면 그건 나 다운 것이고, ‘평소의 자신 답지 않게’ 뭔가를 포기하는 모습도 나의 모습이다. 남의 모습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 답다>라는 명제에 칼을 들이미는 건, 마취가 필요한 수술을 하면서 남의 도움 없이 자신의 배를 가르는 의사와 다르지 않다. 나의 자유의지가 개입된 사건은 전부 다 나 다운 행위의 결과다.

러셀의 역설(Russell’s Paradox)이라는 말이 있다. 크레타에서 온 사람이 ‘크레타 사람들은 다 거짓말쟁이다’라고 한다. 이 사람이 한 말은 참일까 거짓일까? 우리는 그 상태를 결정할 수 없다. 러셀의 역설도 상태를 결정하지 못하는 문제에 관한 얘기다. 전체를 나타내는 전체집합 기호 U는 집합이 아니다. 만약, U가 집합이라고 한다면 U는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 더 큰 집합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고, U는 더 이상 전체집합이 아니게 된다. 반대로 U가 자기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이라 정의한다면 ‘집합’이라는 원 정의에 모순이다. <전체집합 U>가 집합이 아니라 클래스(Class)라 분류되는 이유다.

Eyes Open, Nigel van Wieck

(자신의) 이성으로 자기다움을 정의하다 보면 끊임없는 모순에 빠지기 십상이다. 사고의 견인 점 없이 스스로를 정의하는 행위는 노상 자가당착에 빠진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자기다움을 정의할 수 있는 건 자신이 아니다. <프레임>이라는 이름의 망치로 ‘나 다움’이라는 벽을 깨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할지라도 우리는 그 벽에 손 조차 댈 수 없다. 결국 나 답게 행동하고 있는 자신에게 펀치를 날릴 수 있는 건 ‘행동/이성/감정’과 같은 집합이 아니라 그 보다 상위 초월체인 자신뿐이다. 그러니 더 이상 자기다운 행동을 반복하는 자신을 괴롭히지 말자.

나 답다는 것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땐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와 같은 변명이 진심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First Floor, Nigel van Wieck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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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라는 이름을 바꾸어 불러도 향기는 그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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