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뭇거리다 헤어진 우리: 씨애틀

여행기 #03

여행기 시리즈는 필자가 매 여행마다 겪었던 자전적 경험과 가상의 인물을 교차로 등장시켜가며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글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s’는 여행자인 씨줄과 가상의 인물인 날줄이 얽힌 새로운 자아입니다. 이러한 전제 아래, 필자는 이 여행의 주인공이 될 수도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는 에세이일 가능성도, 사진만 진실일 뿐일 가능성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사진에 나오는 (식별 가능한) 인물은 모두 사전에 동의를 받았음을 밝힙니다.

애틀엔 한 밤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우리는 한국에서의 여독과 샌프란시스코의 강행군으로 녹초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시애틀 4번가에 있는 워릭(Warwick) 호텔에 짐을 풀었다. 힘없이 캐리어를 끌고 올라갔다. 창 밖으로 스페이스 니들(Space Needle)이 보였다. 급하게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워릭 호텔에서 보이는 스페이스 니들

이른 아침 드릴 소리에 잠이 깼다. 우리가 있는 4번가는 번화가였다. 한국으로 치면 명동에 호텔을 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새벽부터 사람들은 분주했다. 룸메이트는 아직 자고 있었다. 나는 트레이닝 차림에 점퍼 하나를 걸쳤다. 아침 산책을 돌았다.

시애틀 워릭 호텔은 번화가 중심에 있다

시애틀은 가을이 채 가시지 않았다. 시애틀은 원래 습하고 비가 잘 내리는 곳이다. 바닥은 축축이 젖어 있었다. 웅덩이가 보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공기에 물기가 서려 있었다. 고층 건물 사이로 날랜 바람은 쌩쌩 불었다.

머리가 살짝 지끈거렸다. 아마 새벽바람이 너무 차거나, 간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도심으로 속속 사람들이 출근하고 있었다. 나는 몇 블록을 걸었다. 아침부터 몰래 개인행동을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너무 멀리 가진 말아야겠다.

나는 방향 감각도 없이 정처 없이 걸었다. 차들이 들어가는 방향을 따라 들어갔다. 다행히 도심이 보였다. 눈 앞에 환상적인 건물 하나가 들어왔다. 주머니에서 손을 빼 얼른 사진을 찍었다. 이 건물이 시애틀 공공 도서관인지 알게 된 것은 여정 이후에 검색을 통해서였다.

시애틀 공공 도서관(Seattle Public Library)

창밖 유리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였다. 유리 건물 사이로 반투명하게 비치는 이웃 건물들은 내가 도심 한 가운데에 있음을 실감케 했다. 용적과 효율만 중시할 것 같은 미국에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도서관 바깥만 세 바퀴를 돌았다. 슬슬 배가 고파왔다. 시간은 어느새 8시에 가까웠다. 모두가 깰 시각이다. 나는 서둘러 호텔로 향했다.

시애틀은 호빗과 스카이폴이 최신 영화이던 시절에 갔었다. 이 여행은 한참 된 기억이다

다행히 가이드는 내가 개인행동을 했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나 시간상 조식을 먹을 여유는 없었다. 나는 급하게 크루아상 두 개를 비닐에 담았다. 버스에 타서 조금씩 먹을 계획이었다.

시애틀의 가을은 촉촉하고 습하다

“여러분, 다들 잘 잤어요? 저는 여독 때문에 엄청 푹 잤네요. 시애틀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드릴게요.”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았다. 잠에서 깨고 한 첫마디였는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시애틀의 별명은 ‘비의 도시’예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이곳은 항구 도시예요. 사방이 물이고, 위로는 알래스카가 있어요. 그래서 1년 내내 비가 수시로 내려요. 비록 이 곳에 많이 있진 않지만 감기 걸리지 않도록 다들 주의하세요.”

버스 안으로 한기가 솔솔 들어왔다. 나는 가방에서 담요를 꺼냈다. 담요를 펼치는데 내 것이 아닌 손 하나가 담요를 함께 펼쳤다. 그녀였다.

“나도.” 그녀가 말했다.

나는 말없이 담요를 가로로 넓게 펴서 그녀의 허벅지에 올렸다. 우리는 같은 담요를 덮었다. 버스 외풍은 아까보다 한결 나았다. 버스는 그대로 한참을 달렸다. 우리는 마이크로소프트 캠퍼스(본사)로 가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반쯤 감고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버스가 진동으로 덜덜거릴 때마다 그녀의 긴 머리가 잘게 부서졌다. 그녀는 창밖을 보고 있었고, 나는 창 밖을 보는 그녀의 머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아침으로 가져온 크루아상 봉지를 펼쳤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그녀가 눈을 떴다.

“나도 줘.” 그녀가 말했다.

“하나 줘?”

“아니, 반만.” 그녀가 말했다.

나는 크루아상의 볼록하게 올라온 배를 반으로 쪼갰다. 그녀에게 한 덩어리를 건넸다. 그녀는 손에 쥐고 머리 부분을 똑 떼어먹고는 다시 선잠에 들었다. 나는 반으로 자른 부분의 큰 덩어리를 떼었다. 빵은 부드러웠다. 풍성하게 부풀어 오른 크루아상의 배는 노란색을 띠고 있었고, 먹기 좋게 구워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버스는 다리 하나를 건너고 있었다.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이 지나고 있는 이 곳 끝에 빌 게이츠 집이 있어요. 여기선 잘 보이지 않는데 엄청 크게 숨어 있어요. 빌 게이츠는 물을 굉장히 좋아해요. 예전에 인터넷에서 봤나 그랬을 텐데, 빌 게이츠 집 한쪽 벽에 아쿠아리움 화면보호기가 떠 있어요. 얼마 전엔 호화 요트를 빌려 가족들과 휴가를 보냈었죠.”

가이드는 조금 쌀쌀했는지 마이크를 잡은 반대 손으로 점퍼를 여몄다. 그가 말을 이었다.

“조금 있으면 마이크로소프트 캠퍼스에 도착할 거예요. 우리는 여기서 간단히 마이크로소프트의 학생 지원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을 들을 거고요, 한인 엔지니어분들과 간담회를 한 시간 정도 가질 거예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버스는 급하게 머리를 돌렸다. 주차장에 들었다.

오른쪽에 ‘환영’이라는 한국어가 보인다. 마이크로소프트 캠퍼스 프레스 센터

우리는 건물 내부에 들었다. 촬영은 회의장과 일부만 허락되어 있었다. 프레스 행사를 위해 서피스 북 초기 버전이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서피스 북을 써볼 수 있었다. 당시 서피스 북엔 윈도우 8이 탑재되어 있었고, 탈착식 키보드가 커버로 제공되었다. 관세가 붙지 않은 서피스 북은 가격도 매력적이었다.

케이트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설명을 맡았다. 그녀는 우리에게 마이크로소프트 서비스를 쓸 수 있는 프로모션 코드와 클라우드에 대해 설명했다. 여행 당시 가장 핫한 기술은 클라우드였다. 그녀는 마이크로소프트가 현재 클라우드에 워드와 프레젠테이션, 엑셀 등 오피스 프로그램을 옮기고 있다고 말했다. 만약 이 기술이 상용화될 경우, 인터넷 속도가 보장된다는 전제 아래 낮은 수준의 하드웨어로도 마이크로소프트의 여러 프로그램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자신감이 넘쳤고, 매력적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열정 있는 지원자들을 환영합니다. 여러분 모두와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케이트는 여기 있는 모든 학생들이 컴퓨터 공학을 전공으로 하는 학생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아침 급하게 추가했다고 말하면서 슬라이드를 켰다.

슬라이드에는 엔지니어로서 마이크로소프트에 지원하는 방법과 회사가 요구하는 스킬이 적혀 있었다. 비록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상아탑 속 화초들에겐 무엇인들 구체적으로 들리지 않겠는가. 우리는 모두 집중해서 들었고, 케이트가 하는 말 한마디에 촉각을 곤두 세웠다.

이후 세션은 한인 엔지니어들과의 만남이었다. 총 네 명이 왔는데 모두들 마이크로소프트의 핵심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다. 한 한국 엔지니어와의 대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저는 수도권 사립 S대에 다니다가 이 곳에 왔습니다.” 그가 말했다.

“아, 저도 그 학교 다니고 있어요. 선배님 안녕하세요.” 그녀가 손을 들었다.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네, 안녕하세요.” 그가 말했다.

“어떻게 이 곳까지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솔직히, 저희 학교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올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거든요. 선배님의 모습이 굉장히 도전이 많이 되고 부럽습니다.”그녀가 말했다.

그는 엔지니어 특유의 픽 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그녀는 살짝 위축됐다.

“선배님은 학교 다닐 때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녀가 말했다.

“음.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저는 학교가 별로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원래 정보올림피아드(컴퓨터공학과의 수학경시대회 같은 느낌)를 준비했었어요. 학교 다닐 때 책 몇 권을 번역했던 경험도 있고, 계속 해외 오픈소스에 기여했어요. 오픈소스 프로젝트 매니저랑 몇 번 이메일도 주고받다가, 그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한다고 이력서를 보내라고 했어요. 보냈죠. 그랬더니 됐어요.” 그가 말했다.

그녀의 눈은 이제 더 이상 반짝이고 있지 않았다.

그는 기계처럼 말했다. “저는 학벌이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아요. 중요한 건 실력이에요. 영어니 뭐니 별로 문제 될 거 없다고 생각해요.”

그의 답변은 우리의 예상보다 더욱 냉소적이었다. 단순한 문자로만 해석해봐도 학부생 수준에서 오픈소스에 해외 도서를 번역한다는 건 상당한 수준이 필요한 일이다. 그녀가 위축될만했다.

“그러니까. 학교에 연연하지 말고, 실력을 키우세요.” 그가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녀는 조용히 손을 내렸다.

우리는 마이크로소프트 캠퍼스를 돌아 나왔다. 그녀는 오는 내내 말이 없었다. 버스는 스페이스 니들 앞에서 섰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면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상아색 카디건이 빗물을 맞을 때마다 짙게 얼룩졌다. 나는 그녀에 어깨 위로 담요를 둘렀다.

그녀를 제외한 모두들 잔뜩 설레 있었다. 가이드는 흥이 나서 말했다. “스페이스 니들은 1962년 세계 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어요. 건물은 콘크리트로 지어졌고 무게만 약 9500톤이 나가요.”

앵그리버드가 스페이스 니들에 인형을 건 건, 이로부터 1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그녀는 확실히 기분이 달랐다. 모두들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이후로 들떠있었다. 무엇이든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스페이스 니들의 높이만큼이나 들떠 있었다.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누구와도 함께 하지 않았다. 속도가 비슷한 그룹이 자연스럽게 삼삼오오 모일 때면, 그녀는 슬쩍 걸음을 늦췄다. 아무도 그런 그녀를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원래 혼자였다. 이방인은 관찰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런 그녀가 너무도 잘 보였다. 함부로 다가갈 순 없다. 고민의 깊이가 깊을수록 말은 무겁고 천천히 나가게 마련이다. 나는 급하게 사진 몇 장을 찍는 것으로 스페이스 니들 관광을 마쳤다.

잠깐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엘리베이터의 ‘하강’버튼을 세 번, 네 번 눌렀다. 나는 얼른 그녀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어디 갈 때 같이 가자며. 말 안 하고 어디가.”  내가 말했다.

그녀는 말이 없었다.

EMP 뮤지엄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걸었다. 나는 그녀와 걸음을 맞추며 이리저리 사진을 찍었다. 괜히 그녀와 감정적으로 동한 척 연기하고 싶지 않았다. 담요가 올라가 있는 어깨는 뭉툭했지만 그 높이가 한참 낮았다. 그녀는 지쳐있었다.

나는 시계를 보고 있었다. 자유시간이 끝났다. 내가 말했다.

“시간 다 됐다. 우리 이따가 숙소 갔다가 몰래 나오는 건 어때?  오늘이 마지막 날 이잖아.”

그녀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우리는 가던 방향을 돌렸다.

우리는 버스를 탔다. 활기차 있었지만 모두들 빗속을 걸은 뒤라 지쳐 있었다. 휴식 시간을 가졌다. 오늘은 시애틀 마지막 날이자 우리의 귀국 전 날이었다. 몇몇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호텔 앞 식료품점에서 맥주를 샀다. 몇 호에서 몇 시에 모이자는 얘기가 들렸다.

방에서 20분을 누워 있었을까. 전화가 울렸다. 그녀였다.

“언제 갈까?” 그녀가 말했다.

“10분 뒤에 로비에서 볼까?” 내가 말했다.

“응. 알겠어.” 그녀가 말했다.

로비에서 만난 그녀는 한결 표정이 좋았다.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됐다. 우리는 로비에서 우산 하나를 빌렸다. 시애틀 도보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우리는 행선지 없이 길을 나섰다.

“벌써 마지막 날이네.” 그녀가 말했다.

“응, 아쉽다.” 나는 말했다.

“이번 여정 어땠어?” 그녀가 물었다.

샌프란에서의 일정과 내가 느낀 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곳에서 느낀 너의 표정과 나의 생각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나에게 현재는 무형의 무채색의 것이다. 나는 그 어떤 것에도 설명을 붙일 수 없었고,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그것에 이름 붙이고 싶지 않았다. 카메라로 열심히 여정을 담았지만 나는 사진을 찍는 족족 그것을 증발시키고 있었다. 나는 회색 도화지였다. 어떤 것을 그려도 티가 나지 않고, 아무것도 안 해도 뭔가 빼곡히 적혀 있는 것 같은 존재였다. 기록한 건 많았지만 남긴 건 없었다.

이런 나의 감상을 어떻게 전할 수가 있을까.

“너, 괜찮아?” 나는 대답 대신 질문을 택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목을 쓰지 않았던 걸까. 목소리는 갈라졌다.

우리는 4번가에서 6번가를 크게 돌고 있다. 호텔에서 나온지는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났다. 체온이 슬슬 떨어지고 있었다.

질문 위에 제안을 하나 얹었다.

“저기서 커피 한 잔 하고 갈까?” 내가 말했다.

우리는 4번가와 파인스트리트 위에 있는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그리고 따뜻한 라테 두 잔을 시켰다. 매장 안은 비를 피해 커피를 사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4번가 메이시(Macy’s) 앞 스타벅스, ⓒ Darryl Ford

“S?” 점원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커피를 찾아와 그녀의 손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녀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동전 소리가 들렸다.

“됐어. 이런 건 사준다는 사람이 내는 거야.”

나는 그녀 손등을 꾸욱 눌렀다.

그녀는 주머니에 있던 손을 꺼내서 컵을 감쌌다.

내가 말했다.

“있지, 만성 환자는 가끔 자기 병을 잊어버려. 고통도 기억이라고. 금방 흐려져 버리거든.”

“응.” 그녀가 짧게 답했다.

“원리는 간단해. 인간이란 원래 절대적인 것보다 상대적인 변화량을 더욱 크게 느끼도록 만들어졌거든.” 내가 말했다.

“이번 여행은 내가 잊고 있었던 아픔을 알려준 여행이었어. ‘아, 내가 만성환자였지.’ 하는 걸 알려줬어.”

나는 라테를 한 모금 마셨다. 취기처럼 온기가 퐁퐁 솟아올랐다. 몸이 녹고 있었다.

“나는 열심히 살았어. 늘 그랬어. 천재는 아니지만 항상 열심히. 그런데 그건 이렇다 할 목적이 있어서 사는 게 아니야. 그냥 나는 열심히 사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거야. 그렇게 하나 둘 경쟁자를 제치는 게 내가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즐거움이었어.”

나는 다시 한 번 라테를 마셨다. 그녀는 조용하게 길 건너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행이 어땠냐고 물었잖아. 나한테 이 여행은 아픈 여행이야. 내가 얼마나 바라는 것 없이 열심히만 사는 존재인지 여실히 느꼈어. 말하자면, 나는 막대기를 쫓는 개 같았어. 막 그것을 쫓으면. 쫓다 보면,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도 느끼고 기분도 좋지. 근데 막대를 줍고 나면 그다음을 모르는 거야. 좋아해야 하나? 내가 이걸 왜 쫓았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주인은 뭔가 자꾸 ‘잘했다’는데, 뭘 잘했는지 알 수가 없어. 나는 개라서 주인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 것도 있겠지.”

내가 말했다.

“이번 여행은, 전력을 다해 막대 쫓은 강아지가 그것을 줍고 고개를 막 들었을 때. 주인도, 목적도 잃어버린 그런 기분이 들었어.”

“나는…” 그녀가 말했다.

“그냥… 네 기분을 조금 알 것 같아졌어.”

“처음으로 벽 같은 걸 느꼈어. 나는 지금까지 열심히 안 했지만, 열심히 살면 뭐든 될 거라고 믿고 있었거든. 물론 이것도 극복할 수 있을 거야. 늘 그랬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뭔가를 느꼈어.” 그녀가 말했다.

“이것도 망각으로 잊을 수 있을까?” 그녀가 말했다.

“익숙해질 수만 있다면.” 내가 말했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 동안 비 내리는 시애틀을 감상했다. 우리가 앉아있던 그곳은. 내가 여태껏 밤에 찾은 스타벅스 중 가장 아름다웠다. 이 날은 우리의 기분과 참으로 대조적인 밤이다. 양 극단에서 반짝이는 두 가지 감정. 그것은 눈물 나게 시리고 우아하다.

집에 가는 길. 그녀가 우산을 들겠다고 나선다. 나는 내 손에 쥐어 있던 그것을 그녀에게 건넸다.

“몇 박 며칠의 짧은 여행 동안,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해?”

그녀가 말했다.

“추욱.” 버스 한 대가 묵직하게 물소리를 내며 우리 옆을 지났다.

나는 잇지 못했다. 너무 많은 마음을 고백한 후였다. 가식을 위한 기름통은 텅 비어버린 후였다. 지금 뱉는 말은 어떤 것이든 진심을 말해버릴 것 같았다. 나는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말했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어.”

“추욱.” 이번에는 소형차 한 대가 우리 옆을 지났다. 횡단보도 앞에 우리는 나란히 섰다. 호텔이 있는 거리엔 어느새 차가 끊겨 있었다. 우리 둘 사이로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빗방울은 우산 천을 때리느라 투둑투둑 했고, 나와 그녀는 입김만 내고 있었다. 나는 행여 내가 숨 쉬는 소리가 들릴까 호흡을 줄였다.

“그렇구나.”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어. 나는 너무 복잡해. 혼란스러워.’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비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왼쪽, 오른쪽 어깨가 각각 젖어 있었다. 간단히 눈인사를 하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웠다. 무드등 하나를 켜고 천장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시체처럼 너절하게 누웠다. 청각 외에 다른 감각을 죽였다. 이내 백색 소음이 고막을 꽉 눌러 담기 시작했다. 쉬익 쉬익 하는 소리가 대뇌까지 차올랐다.

나는 베란다로 나갔다. 비는 모두 그쳤다. 맑은 하늘을 뚫고 스페이스 니들은 우뚝 솟아 있었다.

나는 난간에 양 손을 기댄 채 나지막이 읊조렸다.

나는 내 마음을 회색으로 칠했다.
다른 색깔이 나를 물들이려 할 때마다, 나는 회색 페인트를 끼얹었다.
나는 고통과 슬픔의 하한을 정해 놓을 수 있었다.
그랬더니 행복과 기쁨에도 상한이 생겼다.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르게 아침은 훌쩍 찾아왔다.

우리는 시애틀의 냉랭한 바람을 맞으며 귀국길에 올랐다. 그녀와 나는 다른 좌석에 배정됐다. 나는 샌프란행 비행기 때처럼 모르는 사람과 함께 앉았다. 그는 나를 사적인 거리 안에 두어야 했고, 역시나 어색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우리는 이번에도 눈인사 한 번에 인연을 동강 냈다. 그녀와도 그랬다. 우리는 페이스북 아이디도, 연락처도 교환하지 않았고, 서로의 짐을 찾자 마자 누구랄 것 없이 게이트를 나섰다. 나에게 그녀는 귀국행 아저씨와 하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녀는 옆자리 남자와도 그렇게 인연을 동강냈을까.

Fin.

Advertisements
소고

장미라는 이름을 바꾸어 불러도 향기는 그대로 남는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