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fatigue)

어쩌면 사랑을 한다는 건 모든 지적 수준과
고상함을 뛰어 넘는 감정을 가진 존재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남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 자신이 모자람을 받아들이고
그 부분을 자연스럽게 대상에게 내어 보이는 것.
<생각의 일요일들>, 은희경

는 기대가 많은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고, 눈치껏 행동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가 바라는 모든 것들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뭐라 말할 수 없을정도로 유치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게 투정을 부려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같은 주제로 세 번 이상은 안 그랬으면 좋겠다. 변덕도 이런 변덕이 있을 수 없다.

나는 알고있다. 사람들이 내게 고민을 털어놓는 이유는 이렇다 할 해결책을 원해서가 아니라는 걸. 답답하고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란 걸. 그걸 아는 내가 그 자리에 기대를 걸곤 한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우리의 대화가 당신의 삶에 효험이 있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세 번 이상의 상담에 피로감을 느끼는 것이다. 보통 몇 번을 만난 후에도 상대는 변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눈치를 채지 못하는 걸 수도 있다. 그래도 그렇게 지레 짐작으로 나는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이 사람은 상담에 중독된 거라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를 만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일 자체에 재미를 붙인 것이라고.

어릴 때부터 발에 족쇄를 차고 자란 코끼리는 힘으로 그것이 제압 가능한 때가 돼도 탈출을 시도하지 못한다. 무력함을 학습한 것이다(Learned Helplessness)

나의 피로는 ‘모든 것을 아는’ 감성과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하고 있다’고, 나를 깨치려 드는 이성 사이에서 발생한다. 내 눈앞에 있는 너를 다 안다고 자신하는 S와, 사람을 안다는 거대한 착각을 하고 있다는 S간의 다툼이 나를 피곤하게 만든다. 타인을 예단하는 사람은 별로다. S는 타인을 예단한다. S는 별로다.라는 삼단논법을 인정하는 것이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다. 이런 내적 갈등이 생기는 날에는 차라리 정신적 영면(永眠)을 기원하고 싶을 정도다.

나의 피로는 무력감으로부터 시작된다. 장소와 업무의 명암에 관계 없이 내가 소모된다고 생각되기 시작하면 나의 마음은 여지없이 갈려나간다.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싶고, 꽤나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싶은데, 사실은 그렇지 못할 때. 무력감은 여지 없이 나를 쥐고 흔들어 짠다.

깨끗한 것을 염원하지만 나는 더럽다. 그래서 나는 지하실이 좋다. 백열등이 눈을 깜빡이고, 곰팡내가 나는 그 곳이 좋다. 차단된 공간에 동떨어진 인공의 빛 한 줄기. 그 빛 하나에 나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낀다. 순백의 햇살 치는 공간은 쾌적하지만, 한 번도 내 것 같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나는 결함이 있고, 어지르는 존재라서 순결과는 어울리지 않나 보다.

나는 병원도 좋아한다.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 합법적으로 허락된 공간. 나는 그 안에서 안도를 느끼곤 한다. 이러한 안도감의 형체를 정확히 묘사할 길은 없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건강하기 때문에 느끼는 행복은 아니라고 밝혀 둔다. 나는 병원의 네모반듯한 병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각각의 생과 사의 사투를 상상한다. 병원은 늘 웅성대는 소리로 부산하다. 알콜 솜 냄새가 복도를 은은하게 채운다. 생과 사에 대한 고민은 보통 병실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영원한 것을 탐색하는 것으로 상상의 매듭을 짓곤 한다. 사람은 대부분 영원할 것처럼 행동하지만 병실 안에선 자신의 몸이 한없이 나약함에 발버둥친다. 나는 인간이 차라리 불완전성 앞에 무릎꿇은 그 곳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영원한 것. 나의 피로를 영원히 해소해 줄 그것. 영원할 것은 무얼까. 나의 탐색 끝에 영원한 건 아직 없었다. 그럼에도 과거에 나는 너무나 쉽게 영원을 약속하곤 했다. 모든 것은 나의 치기어린 바람일 뿐이었다. 자꾸만 영원을 저버렸다. 그런 내가 싫어서, 나를 저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아귀를 더욱 세게 쥘 수록, 신뢰라는 모래알은 손틈새로 뚝뚝 떨어졌다. 결국 아무 것도 지켜내지 못했다. 손을 펼쳤을 땐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도 쉽게 영원을 약속하곤 했다. 모든 것은 나의 강한 바람일 뿐이었고, 아귀를 세게 쥘 수록 손틈 새로 모래알같은 신뢰가 떨어졌다, Sand Falls, Domestic

지난 사랑에선 영원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부던히도 노력했다. 지난날의 나를 답습 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영원을 고백하려 할 때면, 나는 국수를 뽑는 제면기의 날처럼 그 줄기를 뚝뚝 베어냈다. 그녀에 대한 사랑도 서슬 퍼런 날에 서걱 하는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영원을 약속하지 않은 덕분에 나아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남은 것은 울퉁불퉁하게 잘린 마음의 표면과 나동그라진 너와 나 뿐이었다. 내가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이것을 네게 온전히 고백하는 것이 옳았을까? 그 어떤 결정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침묵했다. 말을 아낀 내가 갈등하는 동안 나는 자신에게 실망했다. 자해의 상처는 깊었다. 너와 맞잡은 두 손 때문에 네 손에도 피가 묻었다. 우리는 모두 다쳤다.

부디 영원한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빛이 너였으면 좋겠다. 내가 피로를 느껴도 의지 할 수 있고, 네가 피로해지면 세 번 이상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 함께 걷고 싶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흘러도 좋고,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은 마음에 우왕좌왕 해도 좋다. 몇 사람 정도는 길을 걷는 우리 둘 사이로 빠져나가도 좋다. 이렇게 어설픈 내가 네게 한 번만이라도 영원을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게 매너없고 미성숙한 행동으로 여겨지는 사회다. 나는 체면치레로 침묵했었다. 자기 확신도 없었다. 나는 피로하다. 이런 내게 부디 영원한 것이 있다고. 내가 틀렸다고. 그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면서 말을 걸어달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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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라는 이름을 바꾸어 불러도 향기는 그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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