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을 마감하며

월의 어느 날, 아침 면도 중 턱 깨를 베였다. 면도날이 입술과 턱 사이를 횡으로 그은 것이다. 살짝 벌어진 피부 사이에서 핏방울이 솟았다. 핏물은 세면대 위로 뚝뚝하는 소리를 내더니 머리카락이 풀어지듯 곧장 하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연고를 발랐다. 손가락이 지나는 턱밑 깨가 쓰리다. 입술과 턱 사이에 움푹 파인 곳이 쓸렸다. 상처는 아무는 사이에 두 번이나 허물을 벗었다. 턱에는 만년필이 터진 와이셔츠처럼 작은 얼룩이 생겼다. 검지 손가락으로 그곳을 둥글게 얼렀다. 연고를 얼굴에 발랐다. 나는 거울에 비친 자아를 맞이한다. 눈썹, 눈, 그리고 코가 시선을 타고 흐른다. 자화상은 큐비즘 그림처럼 공중으로 뜯기고, 해체된 안면은 과자 부스러기처럼 떨어졌다. 나는 조각난 정합을 시선으로 집어들고 고고학을 시작한다. 왜곡된 원관념과 정합의 투사가 서로를 탐색한다. 이제 나의 사고는 인도양을 건너 관상(觀相)에 똬리를 틀었다.

나는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관상 이론을 제법 알고 있었다. 그것은 수십 해에 걸쳐 어깨 너머로 치른 미신이 두텁게 축적됐기 때문이다. 나는 거울에 바싹 붙어서 초상(肖像)의 조각-부위를 잘게 썰었다.

상처가 위치한 입술과 턱 사이는 움푹 파여 있다. 이곳은 인생의 노년을 의미한다. 만약 여기가 푹 꺼져 있다면 악재를 조심하고 덕을 베풀며 살아야 한다. 아마도 허영만의 <꼴>에서 읽었을 것이다. 이것을 알게 된 이후엔 오지도 않은 노년을 걱정하며 산다. 아마도 강산이 한참을 변해야 느낄 수 있는 운수일 터다. 그럼에도 나는 걱정이 많다가, 악재 위에 얼룩이 졌으니 액운이 가리었다 생각했다. 엿장수식 해석이다.

돌아보면 나의 액막이는 그 역사가 길다. 초등학생 때는 손바닥에 점이 있는 사람이 부자가 된다는 속설을 듣고, 샤프로 손바닥 위에 점을 만들었다. 오 년 전에는 친한 사장님께서 어플로 사주를 봐줬다. 텍스트를 주욱 복사해서 메신저로 주셨다. 점을 보는데 확률이 나오고, 점수가 있다. 어플에 의하면, 2018년에 내가 연애를 할 확률은 20%라고 적혀 있다. 이 운은 서른한 살부터 콩나물 자라듯 올라서 2022년에는 53%가 된다. 추신에 ‘올해는 사람으로 울고 웃는 날이 많을 것’이라 적혀 있다. 나는 글을 읽으면서 계속 입술을 말아 씹었다.

열 살 때부터 파랑새를 쫒았다. 이상, 운, 노력하지 않아도 탄탄하게 펼쳐지는 어떤 것이 내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었다. 그 자신감을 빌어 누군가의 파랑새가 되어보려던 때도 있었다. 날갯짓으로 재롱을 떨고, 어깨를 내어주고, 자리를 지켜보려는 노력이, 내게도 있었다. 그렇지만 무엇인갈 움켜쥐길 바라고, 또 무엇인 척 변신하는 삶의 끝에는 갑충의 껍데기를 지고 있는 자아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은 더듬이를 벌려 숨을 곳을 탐색하고, 바닥에 코를 바짝 대고 설탕물을 찾는다.

풍요의 시대를 지나, 아이-앰-에프 세대를 보내고, 무엇이든 하나만 잘 하면 된다기에 학원을 다니고, 다음엔 융합형 인재가 좋다 하여 그 뒤를 쫓았다. 이제 우리 세대는 찢어진 돛처럼 해안선을 따라 널브러져 있다. 그중 어떤 자아는 오늘 상처 난 턱에 연고를 바른다.

포기하기 좋은 시대다. 이전 세대를 향해 고개를 위로 젖히면, 지하철에서 몸을 밀치고 태극기를 휘두르는 노인들이 보인다. 사랑은 리스크가 적게 모듈화했다. 업장에는 카르텔이 꼼꼼하게 시멘트를 바른다. 감정은 헷지(hedge) 하기 좋게 조각나 있고, 우리는 그것을 취사선택하여 먹고, 뱉는다. 이기적 선택이 자연스런 규칙인 사회다. 이런 세상 속에서도 노력의 끈을 놓지 않는 이가 있을까. 어쩌면 그 이는 끝도 없어 뵈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 빛인지, 착시인지 모를 출구를 발견한 자일 것이다. 잔다르크는 보이지 않는데, 화형대는 곳곳이다. 누가 더 고통을 바라겠는가? 나뭇단을 모으고 불을 붙이자.

포기하기 좋은 시대이기에, 우리는 자존심만은 놓지 못한다. 그것마저 지워지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것만 같아서다. 이전 세대가 자신의 자아를 직업에, 자신이 이룩한 부에, 명성에 두었다면, 우리 세대가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와 교통카드 기능이 추가된 마그네틱 카드뿐이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신용카드로 긁은 자기 위안 더미에서 쉰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에는 유통기한이 있고, 자본주의의 유통기한은 이제 숙성을 넘었다. 문제는 인류가 신자본주의 모델을 개발하기보다, 구자본주의의 수명을 늘려놓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썩은 부위를 잘라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 중 일부는 도려내야 할 부위가 될 것이다.

이번 세대는 커뮤니케이션을 가장 강조하는 세대이면서도, 대화 장벽이 가장 높은 세대다. 해시태그로 만든 ‘소통’이 가장 많은 시대이면서, ‘언팔’과 ‘차단’이 가장 많은 시대다. 남은 것이라곤 몸뚱이와, 다 늙은 자본주의, 데이터 센터에 기록된 인터넷 아우성이 전부다.

나는 추락한 비행기 잔해 더미에서 일어나 사막을 걷는다. 희망을 가지고, 선인장을 베어 물을 짜 마신다. 생은 고기 힘줄처럼 괴로우면서도 쉬이 끝나지 않는다. 마음속 부아가 슬그머니 고개를 치민다. 나는 ‘그래, 무난하게 살고, 작은 불편은 돈으로 해결하고.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인생이 좋겠어.’ 하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포기하려다 보니 들고 있는 것이 없어 오기가 생기고, 나는 또 다시 연명을 위해 와이셔츠를 찢고 터번을 만든다. 내게 미신은 포기 못하는 자가 붙드는 마지막 믿음이고, 신은 모두 내려놓은 자가 마침내 받아들일 수 있는 형상이다. 어쩌면 욜로야말로 자본주의의 임종 앞에서 가장 순수한 자들만이 움켜쥘 수 있는 한 줌의 영토일지도. 나의 발 끝에는 감각이 없다.

숨이 쉬이 빨리지 않는다. 사막에 바람이 부니, 언덕이 무너진다. 내일은 오늘과 다른 사막이다. 고운 모래 입자가 멀리까지 날린다. 오늘 밤, 모래 언덕은 달빛을 받아 지상에 별을 띄웠다. 저 멀리서 셰퍼드 한 마리와 반짝이는 베일을 쓴 이가 나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한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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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라는 이름을 바꾸어 불러도 향기는 그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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