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 담론 01

이 글은 여는 글이다. 현대미술이 왜 난해하고 비판받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이 글은 현대미술의 가격표와 그림을 희화화하고 모든 현대 미술가들을 조롱하는 페북지기들을 향해 세운 날이며, 대중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예술만을 바라보는 예술가들을 꼬집는 글이다. 한편으론 현대미술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마음을 막 열기 시작한 감상자들을 위한 글이기도 하며, 예술을 막 시작한 예술가들이 인간적으로 가졌으면 하는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다.

필자가 말하는 현대미술은 20세기 이후의 포스트모던 미술을 의미한다. 현대미술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정확히는 동시대 미술(컨템퍼러리 아트, Contemporary Art)에 가깝다.


뜨겁다. 반향도 거세다.

현대미술 담론이 뜨겁다. 말초적인 자극을 찾아 희화화하는 페북지기들은 현대미술 작품 일부를 가지고 낙찰가를 운운한다. “똥을 싸도 박수갈채를 친다”는 말은 앤디 워홀의 것으로 거짓 생산되어 돌아다닌다. 잘못된 것을 증거라도 하듯, 사람들은 피에로 만조니의 작품(예술가의 똥)을 들고 “이것을 설명해보라.”한다. 그들 중 일부가 이 작품은 다다이즘에서 이어진 개념미술의 일부라고 자세히 설명을 하면, 이번에는 이우환 작가나 김환기 작가의 작품을 들고 나온다. 사이 트웜블리(Cy Twombly), 게르하르트(Gerhard Richter), 엘즈워스 켈리(Ellsworth Kelly) 또한 이러한 조롱에 단골로 등장하는 작가들이다.

예술가의 똥, 피에로 만조니, 1961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경우, 비교적 최근에 한 전시와 셀러브리티 마케팅, 그리고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화가’라는 권위에 기대어 조롱의 화살을 비껴갔다. 그러나 이것은 마크 로스코의 작품 자체에 대한 대중의 벽이 사라졌다기보다는 셀럽의 권위, 힙스터 물결에 저항하기 두려운 일부 오피니언 리더(페북지기)들의 도피에 가깝다. 이것은 되려 로스코에 대한 모욕이다. 작품의 해설과 조명으로 인한 오해의 해소가 아니라 권위에 기댄 갈등의 소실이기 때문이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 출처: 롭의 갤러리(http://robstorrs.me/)

이제 현대미술에 비판이 거센 이유와, 일부 오피니언 리더들이 대중들을 설득하는 논거를 하나씩 살펴보자. 이들이 현대미술을 삐딱하게 보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작품에 매겨진 말도 안 되는 값어치. 둘째,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름답지 않은 그림. 셋쩨는 예술(藝術) 자체를 해석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지면 특성상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한꺼번에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편(시리즈)을 나누어서라도 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시도할 것이며, 오늘은 이러한 질문의 기저와 현대미술의 의미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보려 한다.


현대미술, 비판의 범주

많은 이들이 조롱하는 현대미술은 순수예술(fine art)에 그 종목이 집중되어 있다. 현대미술을 비판한다는 것은 ‘축구’, ‘하키’, ‘피겨 스케이팅’ 같이 특정 종목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현대미술은 현대 스포츠처럼 동시대 미술을 통칭하는 용어다. 현대미술은 추상화/ 개념미술/ 행위예술을 포함하는 순수예술, 그라피티, 만화, 영화, 게임, 민중미술, 미디어아트, 그래픽 아트 등 현대에 출품되는 모든 예술 작품을 통칭한다. 따라서 ‘현대미술’에 대한 맹목적인 부정은 현대 예술 활동 전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대화(Dialogue), 이우환

 

그렇지만 미디어지기들이 현대미술(現代美術)이라는 말로 순수예술을 조롱할 때, 우리가 웃을 수 있는 이유는 미술이라는 단어 자체를 어렵고, 고상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본 글에서도 ‘현대미술 비판’을 ‘순수예술 비판’과 같은 의미로 적었다. 왜냐하면 이 글은 전문성보다 담론을 활성화하기 위한 글이며, 엄밀성보다 의미 전달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The Museum of Contemporary Art, Oslo

다시 현대미술로 돌아오자. 현대미술은 고상한 사람들만의 상층 예술만은 아니지만 대중들이 쉬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예술도 아니다. 예술가와 평론가들은 이것이 예술의 자율성(autonomy)이 발현된 것이라 말한다. 쉽게 말하면 예술가들이 자본에 휘둘리지 않고 주제의식(=표현하고자 하는 바)을 명확히 전달했다는 것이다. 예술가들과 대중들의 갈등은 주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대부분은 관점 차이 때문이고, 더 깊숙이는 입장을 들어보려 않는 두 집단의 뻣뻣한 고개 때문이다.

우선, 대중들의 입장을 대변하자. 현대미술이 자율성(autonomy)으로 시대정신을 반영한 작품이라면, 그것이 대중문화보다 불친절한 이유가 무언가? 영화나 음악, 신문기사, 긴 논고와 같이 작가의 주제 의식을 잘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라 굳이 예술이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작품 자체보다 설명이 중요하다면, 그것을 학문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표현(美術, 미술)으로 정리하는 행위는 잘못된 범주화의 오류(mis-categorized)가 아닌가 하는 비판이다. 게다가 예술의 자율성 문제는 현대미술의 상업성 비판을 비껴가기 어렵다. 높은 낙찰가에 판매되는 예술이 과연 순수한가, 그리고 이와 같은 현상을 보며 ‘팔리는 순수예술’을 하는 예술가들의 행위가 예술의 순수성에 근거한 행위인가에 대한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엄마(Maman), 1999, 루이스 브루조아

옳은 비판이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하기 이전에 한 가지 용어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 예술의 순수성과 자율성은 예술가의 청렴결백함과 동치는 아니다. 미술품 경매에서 20-30억 하는 현대미술 작품/작가의 순결성 문제는 제작의도의 순수성과는 다르다. 돈을 밝히는 예술가의 작품이 시대정신을 강하게 꼬집었으며, 그것이 독창적이고 충분히 예술적이라면 작품은 자율적이라 할 수 있다. 용어의 혼선이 없어야 하겠다.

사진출처: The Museum of Contemporary Art, Oslo

이제 현대미술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앞서 현대미술은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동시대 미술의 탄생은 카메라(사진)의 등장이 그 기원이다. 사진이 등장하면서 회화는 더 이상 재현(再現, representation)의 임무를 띄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잘 그린 회화 작품일지라도 사진보다 나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후 미술은 사실의 재현에 주제를 두던 것에서 벗어나 조형미나 개념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현대미술은 모던 아트를(마네, 고흐, 고갱과 같은 인상주의 등) 포함한다.

포스트 모던 아트는 이성보다 감성을 더욱 파고든다. 예술은 점점 더 난해해지고, 융합적인 성격을 보인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기존의 회화가 보여주던 이데아의 모방(=형태가 예쁜 그림)보다 더욱 가까이서 이데아를 표현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현대미술가들은 초감각과 공감으로 작가 자신의 순수한 감성을 드러낸다.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의 수단으로 감상자와 소통하기 위해서다. 이것이 현대미술에 설명이 필요한 이유이며, 때로는 평론가와 작가의 말이 맞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대미술 작품이 어려워지고, 공부가 필요하게 된 이유가 사실은 감상자와 더욱 깊게 공감하기 위해서라니. 대중성과 특이성(singularity) 사이의 패러독스다.

노르웨이 오슬로의 현대미술관에서, The Museum of Contemporary Art, Oslo

현대미술은 대상의 표면적인 아름다움의 발현보다 주제의식에 질문을 던지고, 공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자극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자율성을 바탕으로 한 실험정신과 독창성, 그리고 숭고함에 따라붙는 천문학적 미술 경매 가격표가 증거다. 현대미술은 아름다움(beauty)의 표현보다는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감각을 (주관적인 방식으로) 아름답게 형상하는(projection)것에 관심을 둔다. 가장 주관적인 방법이 가장 객관적인 아름다움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현대 미술의 순수성과 아름다움 사이의 갈등은 이 지점에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배우면서 알아가는 예술과 20세기 이전 미학과의 갈등. 진중권은 이를 ‘굳이 표현하자면 보수적인 미와 진보적인 미로 나눌 수 있다’고 했으며, 전통과 규율을 중시하는 사람들과 아름다움의 새로운 기준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로 두 집단을 구분하였다. 물론 진중권의 분류에 우열은 없다. 그저 다름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까지 현대미술의 정의와 탄생 배경을 살펴보았다. 앞서 말한 정의에 의하면,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공부가 필요하다. 공부가 필요한 예술에 우열이 없다니? 다음 장에서는 현대미술과 예술의 우열성, 그리고 스노비즘 이야기로 현대미술의 문을 조금 더 열어보자.

디뮤지엄 9개의 빛 9개의 감성 가운데서, 시사뉴스투데이 16년 3월 30일자 기사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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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

장미라는 이름을 바꾸어 불러도 향기는 그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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