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 담론 02

이 글은 현대미술이 왜 난해하고 비판받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이 글은 현대미술의 가격표와 그림을 희화화하고 모든 현대 미술가들을 조롱하는 페북지기들을 향해 세운 날이며, 대중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예술만 바라보는 예술가들을 꼬집는 글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현대미술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마음을 막 열기 시작한 감상자들을 위한 글이기도 하며, 예술을 막 시작한 예술가들이 인간적으로 가졌으면 하는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다.

필자가 말하는 현대미술은 20세기 이후의 포스트모던 미술을 의미한다. 현대미술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정확히는 동시대 미술(컨템퍼러리 아트, Contemporary Art)에 가까우며, 여기서 언급하는 현대미술은 주로 순수예술(Fine Art)을 지적한다.


현대미술의 추상성 비판

본 글은 현대미술을 옹호하는 글이 아니다. 필자는 기존 미술을 비판한 현대미술은 지성주의적 성과고, 현대미술을 비판하는 것이 반지성주의라는 논리에 반대한다. 이 글은 현대미술을 비판하는 사람들보다 먼저 나와 그것을 희롱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다.

데미언 허스트의 성 바톨로뮤(St. Bartholomew)와 이를 감상하는 사람

현대미술은 상위 문화(high level culture)이지만 우위 문화(superior culture)는 아니다. 필자가 컴퓨터를 처음 배웠을 때, 교수는 필자에게 고급 언어(high level language)와 저급 언어(low level language)라는 용어를 가르쳤다. 필자는 기존의 편견상 ‘고급 = 좋은 것’ 것으로 알아듣고는 고급 언어가 저급 언어보다 우월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컴퓨터 언어의 정의상 고급 언어는 인간의 언어(자연어)와 닮아있을 뿐이었다. 고급 언어일수록 익히기 쉽고 프로그래밍을 하긴 쉽지만, 저급 언어만큼 최적화된 논리를 짤 수는 없다. 고급 언어는 저급 언어들의 통역자에 가깝다. 통역을 하다 보면 의도가 생략되거나 과장되는 부분이 생긴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같은 언어로 소통하는 것이겠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한 마디로 고급 언어와 저급 언어 사이에는 차등이 없다. 다름이 있을 뿐이다. 현대 미술도 마찬가지다. 현대미술은 이해의 난도가 높은 상위 문화이지만, 이를 가지고 계층을 나누는 우위 문화여선 안 될 것이다.

현대미술은 이해의 난도가 높은 상위문화이지만 이를 가지고 계층을 나누는 문화여선 안 될 것이다. / 장소: 구겐하임 뮤지엄

이것은 현대미술가들과 평론가, 큐레이터, 갤러리스트, 일부 감상자들이 유의해야 할 사항이다. 어려운 용어와 복잡성의 예술을 즐기는 자신은 수준 높은 사람이고,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마음가짐은 속물주의(스노비즘, snobbism)다. 이것은 지적 허영이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비방이다.

어떤 이들은 현대미술을 설명하기 위해 수수께끼의 비유를 사용한다. 현대미술가들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구현해 놓고 감상자들에게 수수께끼를 던진다. 수수께끼의 답은 있을 수도 있고, 여러 개일 수도 있으며 해답이 없는 경우도 있다. 현대미술가들은 자신의 인생관을 함축하고 그 정수를 뽑아내어 작품을 만든다.

여자 마법사(Enchantress), 앨런 존스, 크리스티 경매에서 / 사진: Matt Dunham / 출처: AP 통신

현대미술은 추상적이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최대한 가치중립적이길 바라고, 그것이 예술의 자율성(autonomy)이며 예술가로서 최선의 덕목이라 배우기 때문이다. 문자나 음성언어, 기존의 회화는 의미 전달이 명확하지만 그 의미가 집단이나 환경의 의도를 반영할 가능성이 있다. 같은 자세와 구도, 시점으로 최선을 다해 풍경을 그린 사실주의 작품일지라도, 대상이 정물이나 자연물이면 그것을 그리는 데 걸린 찰나의 시간 때문에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다. 이것은 사실주의 작가들에 대한 반향이기도 했으며, 사실주의 예술가들은 다른 영역으로 자신의 활동을 옮기거나 사진을 재현하는 극사실주의로 전이했다.

즉, 추상 운동은 예술가의 가치중립을 지키기 위한 시도다. 추상화가들이 점이나 선, 면, 단색과 같은 기초 조형 요소로 작품을 구성하는 것은 요소의 해체의 끝에 남은 이러한 단위들이 중립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것을 통해 순수하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자 하거나, 감상자에게 상상력의 씨앗을 던져 주고자 한다.

호안 미로(Joan Miró)의 전시, / 사진: Dan Kitwood / 출처: Getty Images

필자는 현대미술(=순수예술)이 영화의 포스터와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포스터는 주제의 요약이고 결정적인 순간의 포착이다. 다만 현대미술은 영화라는 두 시간 짜리 주 내용보다는 포스터 한 장에 모든 내용을 함축하여 던진다. 때문에 감상자들은 같은 것을 보면서도 다른 생각을 한다. 예술가와 평론가의 말 조차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두 시간이나 같은 영화를 보면서도 서로 다른 해석을 하는데, 그것을 함축한 작품은 그 모든 다양성과 비판에 열려있는 게 당연하다.


현대미술의 가격표 비판

현대미술은 해석의 예술이다. 예술가들은 대주제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감상자들은 예술가들의 표현에 ‘인상’을 받고 그것을 해석하고, 그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때로는 작가의 반대 선상에 서서 비판을 하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현대미술은 “추한 이미지야, 추하지?”라며 노골적으로 메시지를 주입하기보다는 “추하게 그려봤어, 네 생각은 어때?”하며 질문을 던지길 좋아한다. 혹자는 현대미술과 자본이 만나면서 궁색한 변명이 붙은 것이 아니냐고 비아냥거린다. 그러나 그것의 전후 관계는 해석이 먼저다.

Schwarze Spitzen을 옮기는 크리스티 경매 직원, 바실리 칸딘스키 작품 / 사진: Stefan Wermuth / 출처: 로히터

현대미술의 거장 중 매번 주제를 바꿔서 그림을 꾸미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의 거장은 자신의 일생을 한 가지 주제에 투사하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반복해서 작업한다. 현대미술 거장은 자신의 삶 자체가 자신의 작품을 대변하고, 자신의 이야기가 곧 작품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현대미술의 작품 한 점에 붙은 어마어마한 가격표는 그 사람의 인생과 대주제의 공감과 값어치라고 보는 것이 좋다. 작가주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한 점에 17-18억 하는 그림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정신적인 가치를 물질적인 기준으로 측정하고 그것을 산술적으로 납득시키길 원한다. 대부분의 현대미술 토론이 수평선을 달리는 이유다.

페이스 갤러리(Pace Gallery)에서 열린 이우환 개인전, 왼쪽에 보이는 ‘선으로부터’는 10억 1000만원에 낙찰된 바 있다

필자는 2008년에 다녔던 학원을 졸업하고,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 학원의 원장 선생님과는 고등학교 선, 후배 사이다. 원장님은 필자에게 대 선배셨고, 지역에서 독보적인 스타강사였다. 원장님이 어느 날 필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S야, 이 곳에 있다 보면 일부 좀 사는 집의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강의해 달라는 말을 해. 그런데 그건 지금 수강생들이 내는 강의료의 총 합과 같거나 큰 금액을 주어야 금전적으로 수지가 맞는 일이거든?

그래서 내가 “지금 듣는 학생 수 곱하기 수강료만큼 주시면 과외를 하겠습니다.”라고 해. 대부분 그럴 금액은 없거든. 그러면 포기하는 거지. 이 문제는 효용의 이야기야. 여러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선생으로서의 효용을 제하고서라도 말이야.”

플라스틱 나무, 카메룬 예술가 설치 작품 / 이미지 출처: PBS News hour, 12/07/2015 기사

20여 억 원의 작품의 소유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세계적인 거장의 작품은 세계적인 록스타가 당신만을 위해 콘서트를 연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그는 미술계에 입지적인 인물일 것이다. 그의 인기에 라이브 논란, 거품 논란이 낄 수도 있다. 그는 미술계의 록스타니까. 그러나 (당신이 구매만 한다면) 콘서트는 당신이 원하는 때에 몇 시간이고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에도 어떤 사람들은 록스타를, 현대미술에 매겨진 가격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들 모두는 각자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를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 어떤 사람은 힙합 음악으로 람보르기니, 롤스로이스를 살 수 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 어떤 사람은 하이패션의 난해함과 디자이너의 높은 연봉을 공감하지 못한다.

* 어떤 사람은 마크 로스코의 작품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 또 다른 어떤 이는 우주여행을 위해 여생을 바치고,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한다.

* 세상의 어떤 사람은 롤렉스의 신제품을 기다리는 것이 싫어 300~400 만원의 웃돈을 주고 미개봉 신품을 구매한다.

이것은 정량적이고 효율로서 딱딱 끊어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들은 주로 인간의 풍요를 위한 것들에 매겨진 것의 가격표다. 가격표는 시점과 환경에 따라 요동친다. 사람마다 아티스트에게 느끼는 심적 효용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칸딘스키의 작품 앞에서

물론 현대미술은 이러한 심적 효용뿐만이 아니라 투기와 탈세의 목적이 끼어 오염된 부분도 있다. 그러나 현대미술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당신의 취미나 행동 중 다른 사람이 섣불리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은 부분이 하나쯤은 있지 않은가?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은 어쩌면 당신의 그 이해할 수 없는 취미에 매긴 효용 가격표에 0이 4개, 어쩌면 5개까지 더 붙은 것일지도 모른다. 부자들의 취미고 효용의 과열이다. 그리고 사실 이것이 거품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게임 참여자들이 결정할 문제다. 스타의 몸값과 무명 배우의 몸값 차이가 팬의 숫자와 굿즈(goods, 관련 상품)에서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런 설명이 현대미술가들은 쉽게 일하고 돈을 번다는 비판을 막아주진 않는다. 다음 시리즈에서는 현대미술가들과 파워(자본)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내는 것으로 담론을 열어보자.

마지막 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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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

장미라는 이름을 바꾸어 불러도 향기는 그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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