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 담론 03

이 글은 현대미술이 왜 난해하고 비판받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이 글은 현대미술의 가격표와 그림을 희화화하고 모든 현대 미술가들을 조롱하는 페북지기들을 향해 세운 날이며, 대중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예술만 중시하는 예술가들을 꼬집는 글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현대미술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마음을 막 열기 시작한 감상자들을 위한 글이기도 하며, 예술을 막 시작한 예술가들이 인간적으로 가졌으면 하는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다.

필자가 말하는 현대미술은 20세기 이후의 포스트모던 미술을 의미한다. 현대미술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정확히는 동시대 미술(컨템퍼러리 아트, Contemporary Art)에 가까우며, 여기서 언급하는 현대미술은 주로 순수예술(Fine Art)을 지적한다.


쉽게 일하고 쉽게 돈 버는 현대미술가

먼저 이 말을 해야겠다. 대다수 미술가들은 기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 현대미술계의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있다. 배우/아이돌과 같은 기타 예체능 분야와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에 사각형, 점 하나, 동그라미 몇 개, 칼질 몇 회로 수십 억의 돈을 챙겨가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다.

몇몇은 “이건 나도 할 수 있다”며 5분 만에 그림판에 슥슥 그린 그림을 jpg 파일로 업로드한다. 그러나 그들이 모방한 아이디어에 주관은 없다. 해당 요소가 나오기까지의 계량적(chronographic)인 노력이 없으며 해당 표현이 대상의 주제의식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한 형태라는 진화의 과정 또한 찾을 수 없다.

허핑턴포스트의 <아트를 보며 “나라도 하겠다”라고 말하면 안 되는 이유>에서 글을 발췌해 보자.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몬드리안의 <구성(compostion) no. 3>

몬드리안의 작품을 예로 들어 보자. 그녀는 당신에게 몬드리안의 부드럽고 산뜻한 선을 만드는 것을 생각해 보라고 한다. 당신은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을 짜고 색을 만들고, 공들여 캔버스에 물감을 칠할 수 있을까? 그런 다음 갤러리 주인, 큐레이터나 고객에게 작품을 넘기고, 반드시 찾아올 비평을 기다릴 수 있을까? 작가와 호기심 많은 구경꾼들에게 당신의 결정을 변호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당신 자신의 모티브에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자신을, 당신의 아이디어나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와 관점을 창조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자신의 작품관을 인터뷰하는 이우환 2009년 6월
자신의 작품(점으로부터)을 설명하는 이우환

이것은 비평가들의 ‘그림을 빨아주기’ 문제다. 예술가의 목적은 정교한 솜씨와 곡선의 재현, 미인의 구현으로 대상을 자극하는 것 만은 아니다. 그 표현이 간단할지라도 그것이 상대를 감흥 시키지 못 한다면, 그리고 비평가들이 그것에 효용이 없다고 느낀다면, 현대미술은 정부가 권장하는 노동의 대가(시급) 보다 못한 산물일 수 있다.

문제의 본질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가 모든 것들을 가격으로 서열화하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 = 비싼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라는 인식의 출발도 이 곳에서부터다. 예술은 앞서 말한 ‘심적 효용’이라는 단어의 추상성 때문에 투기 대상으로 오염됐다.

현대미술은 소수를 겨냥한 취향인 경우가 많고, 이러한 취향을 보장하는 소수가 결정권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소위 <예술 스폰서>도 존재한다.

구겐하임 뮤지엄, NYC

예술 스폰서는 존재한다. 영국에서는 대표적으로 찰스 사치(Charles Saatchi)가 유명하다. 성공한 광고회사의 임원이었던 사치는 YBA 그룹의 대표 작가들을 발굴하고 띄워주었다. 이 과정에서 데미안 허스트가 대스타가 된다. 그의 작품은 파격적인 특성만큼이나 반발도 거세서, 지금도 YBA를 ‘광고로 만들어진 작가들’이라고 평가 절하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에는 모마, 구겐하임 미술관을 후원하는 재벌 세력이 존재한다. 구겐하임은 이름 그대로 구겐하임 재단 산하에 있고, 모마는 록펠러 가문의 후원을 받는다. 이외에도 미국에서는 재벌들이 (탈세와 투기의 수단으로) 예술 재단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단순히 기부하면 돈의 사용처를 밝히기 어려운데, 이렇게 재단을 만들거나 미술관에 두면 실물로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을 연봉으로 서열화한다. 엑셀에 가격표를 찍고 오름차순으로 나열했을 때 나의 순위가 셀 한 칸에 정해져 있음은 자본주의가 힘차게 돌아갈 수 있는 원동력임과 동시에 인간성을 상실시킨다.

브루클린 뮤지움에서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해설을 듣는 관람객 / 사진: Mark Bonifacio/NY Daily News

현대미술의 난해함과 자율성은 누군가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흉측하고 투기에 지나지 않는 쓰레기 덩어리로 보일 수 있다. 현대미술관에서 누가 먹다 버려진 쓰레기를 작품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청소부가 전시된 공병을 쓰레기인 줄 알고 치워버렸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이러한 태도는 현대미술이 감상을 대부분 감상자의 주관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가 이 글을 쓰며 현대미술을 말하는 이유는 ‘덮어놓고 비난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자신만의 벽을 쌓고 ‘숭고함의 제단을 쌓는’ 예술계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저열한 댓글 문화와 예술계의 침묵은 소통을 단절하고 두 집단을 양극화한다. 대중은 극단적인 두 섬으로 가는 길에서 쉬운 길을 선택한다. 예술계는 그런 대중을 또다시 외면한다. 순환논리의 함정이다.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현대미술에 비평가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현대미술은 되려 그 어느 때보다 ‘공감을 바라는 미술’에 가깝다. 그 공감의 깊이가 개인적이고, 초감각적으로 변했기에 가이드(전문가: 도슨트, 비평가, 공부)가 필요할 수는 있다.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 객관적인 의미 전달을 위해 조금 더 함축적이고 원자적인 요소를 사용하는 것이다. 현대미술가들은 전문가를 가리고 우열을 내기 위하여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단, 관련 직종이나 시험을 보는 것은 예외다. 성적은 매겨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 성적도 따지고 들면 설득의 결과다. 수치적 산물 또한 공감의 문제라는 얘기다.

나무들(woods), 2005, 게르하르드 리처Gerhard Richter

어떤 이들은 음악이나 안무가 아름다운 것은 ‘보면 안다’고 말하면서, “현대미술은 예쁘다는 것을 설득까지 해야 하냐”고 비판한다. 필자는 그들이 정말로 현대음악이나 현대무용을 ‘보면 알’지, 듣거나 본 적은 있는지 되묻고 싶다. 포스트 모던 예술은 가장 완벽한 객관성을 위해 극한의 주관성(singularity)을 추구한다. 이것을 아이들이 그림과 비교하며, 얘랑 이 작품이랑 뭐가 다른지를 물었을 때 할 수 있는 대답은 ‘메시지’다. 이것은 정성적인 것의 술회(述懷)다. 페이스북에 있는 수많은 미디어지기들이 엄지를 받아가며 자극하는 이것은 맹목적인 비난이다. 자신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변용에 대한 격한 거부다. 이것은 아픈 일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피규어를 모은다. 어떤 사람은 연필에 집착한다. 어떤 이는 다른 건 몰라도 자전거에 큰 재산을 투자한다. 이유가 있다곤 하지만 취향에는 이유가 없다. 매겨진 가격 또한 그 원류를 찾아보면 정성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기댓값이다. 만약 당신이 좋아하는 어떤 것을 만드는 회사가 상품 가격을 올리고, 그것에 이유가 없다 한다면, 당신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욕을 하면서도 그것을 구매하던가, (대안을 찾는 것을 포함하여) 그렇지 않던가.

거리의 예술(Art in the Streets’)이라는 주제로 전시된 그라피티, MoCA, LA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너무 날을 세우지 않았으면 한다. 인간은 0과 1, 가치와 생산품(品, 물건)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만든 시스템이지만, 이 시스템 속에서 태어난 다음 세대 인간들은 인간이 본 시스템의 창조자임을 깜빡한다. 자본주의, 황금주의 시대에서 인간의 길을 고민했으면 한다. 공존은 이해뿐만 아니라 무시와 방목(放牧, 방치하여 둠)을 포함한다. 반목(反目)하며 조롱하는 것은 스노비즘만큼이나 무가치하다.

구성(composition), 1916, 몬드리안

현대미술(순수예술) 관계자들도 마찬가지다. ‘대중이 예술에 무지하기 때문에 냉소적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변화하지 않는다면 미술의 양극화는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더 큰 예술을 할 수 있는 현대미술가들이 미술을 포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갤러리와 개인 작가들의 갑을 관계, 예술은 외골수처럼 가난해야 한다는 인식, 학벌주의와 스폰서를 찾는 예술은 한국 미술 중산층(갤러리, 뮤지엄, 큐레이터, 미술 언론, 경매회사)이 솔선하여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다. 사실 이 문제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 유럽이 과거에 앓았으며 지금도 앓고 있는 문제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 자본까지 가세하며 아시아 미술 마켓이 꿈틀대고 있는 시대다. 만약 우리가 위의 인식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한국 현대미술의 양극화를 초래할 것이다. 미술계는 재벌사회의 축소판이 될 것이다.

현대미술은 메시지에 치중한 그림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대미술, 특히 순수미술은 ‘진정한 아름다움(美)이 보편성보다 개인성, 감상평에 있음’을 믿는다. 작가 안에 있는 이상형(=이데아)을 표출하기 위해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기법들을 끌어온다. 공감각을 자극하는 미술, 골격, 해체, 단순성 또는 극한의 복잡성을 추구하는 모습은 어쩌면 최상의 아름다움을 위한 작가 개인의 몸부림이다. 가장 주관적인 방식으로 상대의 심상을 깊숙이 때리는 경종이다.

구성(Composition) no. 10, 1939-1942, 몬드리안

칸트의 미학 이야기와 현대미술을 향한 한 네티즌의 일침을 끝으로 담론의 문을 열어두고자 한다. 필자는 현대미술을 좋아한다. 작품에 대한 값어치와 효용에는 전적으로 수긍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하지만 필자는 나의 효용과 금액적인 부분을 비교하는 정도에서 선을 긋곤 한다. 이 이상의 논쟁은 (어쩌면) 소모적이고, 거부(巨富)들의 활동에 out of one’s league(‘내가 활동할 리그가 아니다’ 정도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라는 비아냥을 벗어나기 어렵다.

칸트:

칸트는 미학을 연구하면서 이러한 문제(현대미술 특유의 의미 전달을 단순히 고상/난해하다고 매도하는 방식)를 지적했다. 과학과 달리 어떤 기준을 정해서 정량화할 수 없는 것이 예술이다. 분명 다수가 선호하는 예술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마이너 취향을 무시할 수도 없다. 현대미술은 지나친 엘리트주의도 경계해야 하지만, 과연 다수결에 따르고 대중적인 것을 따르는 것이 무조건 옳은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네티즌의 비판:

현대미술계가 대중들의 비판에 친근하게 다가가고 싶다면 대중이 예술계에 왜 이렇게 냉소적으로 되었는지 스스로 곱씹어보고 성찰해야지, “대중이 예술에 무지하기 때문에 우리가 냉소적이다”라고 결론짓고 변화하지 않으면 문제입니다.

김환기 작품들, 2015, 출처: 현대갤러리

현대미술담론.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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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

장미라는 이름을 바꾸어 불러도 향기는 그대로 남는다

현대 미술 담론 03”에 대한 답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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