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그림처럼 바라보기 위해서 (1: 고흐에서 인상주의까지)

들어가며

시계를 사랑하는 사람은 시계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기능에 충실한 복원품으로서, 산업 디자이너의 현대적 해석품으로, 다이얼과 케이스에 새겨진 장식적 문양으로부터, 금과 플래티늄, 티타늄 등의 소재가 지닌 순물질의 물성에 매혹된다.

어떤 사람은 시계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들은 시계 장인과 정밀 기계가 만들어낸 상품에 기예(技藝) 이상의 ‘어떤 것’을 발견한다. 이들은 물건에 합당한 가격을 지불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것을 예술로서 칭송한다. 브랜드나 제작자로서는 참으로 뿌듯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시계에서 ‘무엇이 예술인지’를 묻는다면 그 대답은 쉽지가 않다. 주인 되는 사람이야, “(이 시계) 딱 보면 예쁘지 않나요?” 할 수 있겠지만, 어떤 것은 다수의 사회적 합의가 있더라도 그 아름다움을 인정하기 쉽지 않다. 우리가 모던 아트를 바라보는 시각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모던 아트는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기준에 분절점이 있다. 어떤 이는 모던 아트가 ‘아무것도 아닌 예술’이라 일축한다. 이들은 고전 예술과 모던 예술을 비교하면서 “고전 회화는 딱 봐도 예쁜데 현대 회화는 그렇지 않다”며 클리셰적 불만을 토로한다. 그렇지만 ‘현대 미술의 클리셰’는 아무리 들어도 진부하지 않다. 그 이유는 현대 미술이 일반 감상자들의 궁금증을 제대로 해소해주지도 않고 무심하게 제 갈길만 바삐 가기 때문이다. 물론 고전 예술에도 좋고 나쁨의 취향이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현대 미술에 비하면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고전 미술은 최소한 형태는 알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이 글은 시계를 좋아하면서 동시에 평소 현대 미술에 의문점을 가진 독자들을 위해서 준비했다. 우리는 “왜 예쁜가?” 혹은 “별거 없는 것 같은데 왜 의미가 있는가?”하는 예술을 다루고, 그것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시계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엔 그것들의 미학적 가치를 논할 것이다.

현대 시계의 미학적 가치는 아직 충분히 논의된 바 없다. 이것은 한국 뿐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범주의 오류(category mistake) 때문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에 설명을 적어뒀다. 그렇지만 필자는 현대 시계가 예술의 표현 영역으로 확장되길 희망하는 사람이다.

참고로 이글을 읽는 이 중 예술가가 있다면, 필자는 시계를 주제로 작업하는 예술가가 되는 것이 충분히 해봄직한 일임을 말하고 싶다. 이곳은 제대로 해낸 사람이 몇 없어, 뜯어먹을 것이 많은 들판이다. 잘만 할 수 있다면 거부(巨富)의 주목을 받아 상당한 재력을 축적하는 일도 있을지 모른다. 무책임하게 들릴진 몰라도 이것은 아예 실현 불가능한 일은 아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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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허스트는 그의 초창기 예술 작업인 스핀 페인팅(spin paining)에 파네라이 시계 다이얼을 붙여 미술을 한 바 있다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 글이 독자에게 수용 불가능한 지점이 있던 시계를 다시 한번 바라보는 계기였으면 좋겠다. 읽는 분들의 미감 수용체가 확장되는 체험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바람이 좋은 어떤 주말, 테이블 위에 올려둔 본인의 시계. 그것의 아름다움을 곱씹어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자신이 좋아하는 시계가 왜 좋은지, 다음에 살 시계는 어떤 것이고, 그 미학적 이유가 무엇인지 찬찬히 생각해보는 체험까지 이어지길 기대한다. 종국에는 “예쁘다”는 언어를 다각도로 사용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계를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확장에는 고통이 필연적이다. 미감을 확장하는 훈련에는 예술 사조라는 가시밭길 행군이 포함돼 있다. 읽는 분들의 고통을 최대한 덜어내기 위해서 고전 미술에 대한 설명을 과감히 생략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짐을 조금 던 행위일 뿐이다.

당신은 아마도 몇 번을 꾸벅대며 졸 수도 있다. 만약 그런 지점이 있다면 피로사회에 절어 사는 여러분들을 위로하는 필자의 배려라고 너그럽게 생각해주셨으면 한다. 그럼에도 지루함을 떨쳐낼 수 없다면 과감한 생략 또한 길이 될 수 있다. 부디 무리하지 않았으면 한다.

고흐에서 인상주의까지

시계의 미학적 가치를 직접 다루기 전에, 우리는 그에 대응하는 미술사를 이해해야 한다. 발상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접하는 예술은 뜬금없다. 지루할 뿐 아니라 맥락이 없다. 이것은 마치 국어 사전을 ‘ㄱ’ 부터 읽는 것과 같다. 사전은 무언가를 찾아서 쓰기엔 좋은 참고서지만, 순서대로 읽기에는 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계를 직접 이야기하는 순서 대신, 초기 예술 형태와 당대에 유행하던 사상이 어떻게 흘렀는지 먼저 이야기하면서 시계 미감까지 차근차근 접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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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물길드의 평의원들, 렘브란트, 1662

기계식 시계는 16세기 부터 그 크기가 작아지기 시작해서 17세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손목 시계의 형태가 된다. 계몽주의는 이 시기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였다. 이것은 서구 중심의 이성적 사유체계로, 사람들은 합치할 수 있는 이상적인 기준이 세상 어딘가 반드시 있다고 믿는 사상이다. 그리고 시계는 계몽주의가 가지고 있는 목적과 가장 부합하는 현물(現物)이었다.

계몽주의의 주된 덕목인 정밀함과 합리성의 정신은 시계의 정확도, 계측기능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이 시기 인류는 합의 가능한 보편적 진보를 탐구했다. 인류는 이데아(idea)라는 이름에 갈고리를 걸어 현실로 끌어내렸다. 그리고는 인식 저 편에 두었던 이상, 믿음을 해결 가능한 문제로 정의하고 하나씩 증명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실험을 했고, 실험으로 찾아낸 법칙과 규칙을 통틀어 과학이라 명명했다.

성공에 취한 사상가들은 이제 자연 법칙 뿐 아니라 인식, 정신에도 합치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믿게 된다. 이렇게 17세기 부터 20세기 까지 지속되는 경향을 모던이라 부른다. 예술 역시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예술가들은 약 300년 이라는 시간을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객관적 요소가 있다고 믿고, 실험했다. 이들은 보물을 찾듯 절대적 미의 기준을 찾아 정진했다. 주류로 인정받은 미술 이론은 사조(-ism)가 됐다. 이렇게 발견한 미의 법칙은 시스템으로 자리잡았다. 흔히들 예술가는 창조적인 것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그들은 사실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유명한 미술 법칙을 재현하며 보냈다.

그렇지만 역사가 흐르지 않고 고이면 썩는 법이다. 미술계도 마찬가지였다. 기존 기법을 답습하는 행위가 완곡해지자, 반발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충분히 교육받은 사람들끼리도 합치할 수 없는 미의 지점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우선, 신예 화가들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합의로 결정된 이상적 아름다움 앞에 화가는 기예를 실천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계몽주의 이데올로기의 그늘 아래서, 화가는 붓(도구)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었다. 불만은 누적되어 터질 곳을 찾아 힘을 비축했다. 마침내 예술은 ‘주관성’이라는 무기를 들고 고인 둑을 터뜨렸다. 인상주의 미술이 등장한다. 이제 예술가들은 이제 자유로운 실험을 시작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찾게 된 것이다.

민중을이끄는 자유의여신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 1830

미의 규칙에 대해서 구체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은 프랑스 대혁명(1789) 부터였다. 프랑스 대혁명은 예술 뿐 아니라 인간 혁명이었다. 조제프 시에예스(Joseph Sieyes, 1748-1836)는 프랑스 혁명을 두고 “혁명 이전에 귀족을 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표현한 바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모든 개인에게 인권이 생겼고, 인간은 누구의 종속물이 아닌 자립 존재로 우뚝 서게 됐기 때문이다. 이 시기 예술가들은 테크네(techne, 기예)과 자신을 분리하기 위해 노력한다.

오늘날 우리가 좋아하는 세잔이나 고흐, 고갱의 것은 당대 평론가들에겐 비판하기 쉬운 마이너 예술세계였다. 그들은 무명으로 살다가 죽거나, 아카데미에서 인격적 모독을 당하거나, 전시에서 쫒겨나는 등 갖은 수모를 당했다. 이와 달리 당시 잘나갔던 예술가들은 공무원 같은 존재였다. 공무원 예술가들은 주제나 작업세계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 앞에는 주문받은 제단화나 성서화, 초상화 대기열이 넘쳤다. 작업은 공무를 하듯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당대 유명 예술가들이란 후원가들이 선호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이들 중 운 좋은 소수만이 오늘날 미술관에 남았지만.

곰브리치(Sir Ernst Hans Josef Gombrich: 1909-2011)에 의하면, ‘하수인으로서의 예술’은 19세기에 들어서야 거의 무너졌다. 해방과 평등의 이념이 귀족이라는 나무를 베어버렸기 때문이다. 후원자의 자금 지원을 받던 예술가들은 자유의식 아래 자기 예술을 찾아 떠나야 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거리로 나와 초상화를 그렸다. 치욕적이었다. 예술가들은 구겨진 자존감이든 무엇이든 자신의 에고를 그림에 녹여내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쟁취한 자유와 가난이 미술사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금전적 풍요가 끊기고, 권태의 씨앗이 바닥에 떨어지자 창조성이 자라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성공한 사업가와 미술가는 서로 대척점에 있었다. 전자는 미술가들을 시덥지 않은 작품에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붙여 파는 사기꾼이라 여겼다. 반대로 미술가들은 부르조아들이 자본으로 만든 새 계급이 터무늬 없다고 비판하며 그들을 자신들보다 낮은 수준의 안목을 가졌음을 공개적으로 비웃었다. 두 세력이 만나는 곳은 미술이었다.

화가들은 미술로 자본가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자본가들은 모자란 감각을 넓히려 들다가 되례 무지한 민낯이 까발려졌다. 그러나 자본가들을 향한 비판이 언제나 성공적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풍자는 오직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 그것을 대중으로부터 인정받은 사람들에 한해 인정됐다. 결국 오늘날까지 이름이 남은 사람은 에고 센 삼류 예술가 더미에서도 자신의 철학을 인정받은 소수였다. ‘예술이라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창의적인 질문을 던진 사람들 말이다. 예술가들의 독립적인 성공 길은 이 시기 부터 열린다. 물론 이 시기까지도 뛰어난 기교나 금액이 큰 작업을 수주받아 유명해진 화가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조토, 미켈란젤로, 홀바인, 루벤스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의 예술은 전근대예술이라 불리며 참고 자료로서 교과서에 실려 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미술계는 모사가들의 역사에서 기존의 인습에 저항하고 새로운 미술의 길을 발견하는 반항아들에게 바통이 넘어갔다. 미술은 이때부터 끊임없이 태동의 굴레를 돌며 발전한다. 기존의 대세 세력을 정(正)이라 하면, 반(反)의 세력은 그것을 타파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내려는 노력과 연합이다. 그리하여 정도, 반도 아닌 새로운 어떤 것이 주류 미술계에 편입되는 순간, 미술계의 영역이 확장됐다(合). 그러나 이렇게 완성된 합 또한 모순적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합의 세력에서 현실에 안주하는 예술가가 나오는 순간, 그것은 다시 정이 되어 반과 합의 역사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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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줍는 사람들, 프랑소와 밀레

이 작업은 밀레(Jean Francois Millet, 1814-1875)의 이다. 질문을 하나 던져 보자. 이 작품이 당대 사람들에 눈에 아름다워 보였을까? 이 작품은 아무런 극적 사건도 없고, 우리가 좋아하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없다.

작품에는 농부들 세 명이 달랑 등장하는데, 그마저도 열심히 일하는 장면이다. 여인들의 육체가 세련된 것도 아니다. 작품에는 노동에 특화된 근육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것은 잘 다듬어진 그리스인의 이상적인 신체 비례와도 관계가 없다.

실제로 오르세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차분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크기의 작업(50호, 112 x 84 cm)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사실 이 작품이 의미를 가지는 지점은 이 곳에 있다. 밀레의 작업은 ‘평범함’을 주제로 삼았을 뿐 아니라 베짱있게도, 이것을 커다란 캔버스에 표현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예술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음을 상기하자. 그나마 돈이 조금 있는 상인 집안은 스케치북 만한 크기의 초상화를 소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밀레는 돈 있는자를 위한 작품을 그리지 않았다. 이삭을 줍는 일. 세 명의 노동자가 주인공이다. 밀레는 권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아름다움의 기준을 일상으로 끌어 내려 그것을 예술이라 부른 최초의 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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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쿠르베씨, 구스타프 쿠르베, 1854

당대 평론가와 대중들은 밀레를 비웃었다. 아무 주제도, 의미도 없는 그림을 큰 화폭에 담았다는 비평을 들었다. 그의 동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도 밀레와 마찬가지였다. 1855년, 쿠르베는 개인전을 열고자 했으나 갤러리와 살롱이 그의 작품을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파리의 한 낡은 건물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개인전의 이름은 ‘사실주의(Le Réalisme), G. 쿠르베 전’이었다. 쿠르베는 자신의 예술 스승은 오로지 자연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연출된 아름다움, 권력 관계를 그리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 싶었다. 대중은 여전히 호응이 없었다. 그렇지만 예술가들은 이 전시를 보고 자극을 받았다.

쿠르베의 사실주의 전시 이후, 예술가들은 주류 아름다움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아름답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배가 볼록하고 수염이 기름진 지방 귀족의 그림일까? 양을 끌어안고 있는 성모의 모습일까? 예술가들은 이제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것들을 내려두고 탐색을 시작했다. 쿠르베와 밀레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역사적 그림이나 성서화, 초상화를 최고의 예술이라 여기고 있을지 모른다.

반향의 물결은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와 그의 친구들에게 이어진다. 이들은 쿠르베의 지난 작업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퇴색한 회화의 인습을 찾아내려 했다. 결국, 그들은 기존 예술이 진실된 모습을 묘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존 예술은 이상적인 환경에서 완성되는 것이었다. 과거 화가들은 빛이 가장 잘 들어오는 날에 모델을 세워 포즈를 취하게 하고 그것을 캔버스에 옮겼다. 다른 날, 정물을 그리기 좋은 날이 되면 그것을 복사-붙여 넣는 식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이것은 마네와 동료들에게 ‘인위적인 술수의 집합’에 지나지 않았다.

마네는 본인이 알고 있는 형상에 집착하여 대상을 미화하는 경향을 탈피하고자 했다. 우리가 옥외에 나가 자연을 볼 때, 각 대상들은 고유한 색깔을 지닌 개별물이 아니라 우리의 눈에서 뒤섞여 훨씬 더 밝은 색조의 혼합물로 보인다. 마네는 이것이 진실된 모습이라 생각했고 화가가 옮겨야 할 궁극적인 미의 형상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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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에드아르 마네, 1880

과학적으로 눈은 대조를 통해 사물의 형상을 파악한다. 어두운 면과 밝은 곳 사이를 찾고 그 지점을 경계 삼아 형상을 완성하는 식이다. 때문에 마네는 여인의 옷을 칠흑보다 더 짙게 그렸고, 대조적으로 눈의 일부를 흐릿하게 마무리했다. 코는 제대로 보이지 않고, 꽃은 그 형태가 보일듯 말 듯 하다.

마네에겐 이것이 궁극적 예술이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도 마네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함께 발전시켰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찰나의 순간’을 연구했다. 대상을 아름답다 여기는 찰나의 시간, 그때의 빛, 바람, 환경, 인물의 표정을 옮겼다. 그는 순간적인 양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재빨리 그림을 그렸다. 실제로 모네의 작품을 보면, 어떤 부분은 빠른 필치로 붓질을 하느라 군데군데 칠이 비어 있다.

비평가들이 모네의 그림을 싫어했던 이유는 불완전한 마무리 때문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이것을 미완성 작품이라 판단했다. 작업은 살롱, 주류 미술에 들지 못했다. 1874년, 모네는 결국 주류 전시를 하지 못하고 친구들과 함께 어느 사진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전시를 개최한다. 그는 이 전시에 라는 작업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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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해돋이(Impression, sunrise), 클로드 모네

 

아웃라이어들의 전시는 장내에 웃음거리가 됐다. 당대 비평가였던 루이스 르로이(Louis Leroy)는 이 그림의 제목이 특히 우습다고 생각했는지, 그 전시에 참가한 그룹 전체를 ‘인상주의자들(Impressionists)’라고 조롱섞어 불렀다. 그가 기고한 글의 일부를 이 곳에 옮긴다.

“인상주의자들의 작업을 보면 무엇이 인상주의인지 확실히 알수 있다. 그것은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것과 미숙한 기술에 대한 약점을 비껴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변명거리가 인상주의라는 것이다. 전시장의 벽지가 그 바다 풍경(인상: 해돋이)보다 훨씬 더 완벽하다.”

우리가 오늘날 사랑해 마잖는 인상주의 화풍은 당대엔 경멸 섞인 용어로 쓰였다. 당신은 어쩌면 당대 평론가들이 바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평론가들만 이런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대중들도 인상주의자들을 비웃고 외면했다.

오늘날 동시대 미술을 향한 우리들의 시선과 어딘가 유사하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참고: 현대미술 담론  01). 이것이 비웃음을 많이 살 수록 더 좋은 예술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대게 프로토타입은 도전적이고,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되짚고 싶을 뿐이다. 요즘 평론가들은 비평보단 칭찬에 후하다. 네거티브를 줄여 실수를 면하려는 교훈일까 궁금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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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라는 이름을 바꾸어 불러도 향기는 그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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