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그림처럼 바라보기 위해서 (2: 근대에서 현대로)

근대에서 현대로

고전 회화는 건너뛰도록 하자. 전근대 회화와 현대 미술을 구분하는 느슨한 기준이 있다면 화가가 자연을 보이는 대로 그리려는 화가였는가, 그렇지 않았는가 하는 구분일 것이다. 초기 세잔의 작업과 르누아르, 마네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전자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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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닉 사촌의 초상화(Portrait of Uncle Dominique), 폴 세잔, 1866,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유

우리는 위 작업에서 초기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의 인상주의적 면모를 볼 수 있다. 사촌을 보이는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빠르게 칠해내려간 붓질과 극명한 명암, 뾰루퉁한 표정이 잘 드러나는 듯한 묘사가 그렇다. 그는 인상주의를 사랑했지만 대중들과 평단은 인상주의자들을 외면하고 조롱했다. 세잔은 이 때문에 자신의 작업 세계에 염증을 느낀다. 마침내 그는 인상주의를 버리고 자신의 고향인 엑상 프로방스에 돌아가서 자신의 예술관을 넓히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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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조프리의 초상화(Portrait of Gustave Geoffroy), 폴 세잔, 1895, 오르셰 미술관 소유

이 그림은 세잔이 프랑스의 문학가이자 비평가인 구스타프 조프리(Gustave Geoffrey)를 그린 그림이다. 후기 세잔은 사물의 재현이 아니라 화가가 추구하는 절대적인 균형과 공간감을 화폭에 담고자 했다. 위 작업은 세잔의 후기 예술관이 상징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어쩌면 일부 독자들은 상단에 있는 도미닉 사촌의 초상화와 비교했을 때 차이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자의 작업은 사실적 비례와 순간으로 그려진 작업이고, 위 작품은 화가의 주관적인 구도와 실험, 철저한 계산으로 완성됐다.

우선 이 그림은 기존의 예술 전통을 철저히 무시했다. 예컨대 책상이 눕혀진 각도를 기준으로 소실점을 잡는다고 했을 때, 피사체는 지금처럼 정면을 바라볼 수 없다. 위에서 아래를 보는 책상 구도를 채택한다면, 조프리는 얼굴보다 정수리가 더 보여야 한다. 그렇지만 세잔은 화가의 주관으로 책상 위의 난잡함과 조프리의 얼굴을 동시에 표현했다. 의도적으로 소실점 규칙을 무시한 것이다. 그렇지만 위 작업은 어딘가 불편해 보인다거나 어색해 보이진 않는다. 그 이유는 세잔이 책장으로부터 시작해서 의자 모서리를 타고 팔꿈치, 책상으로 이어지는 선을 만들어내어 인위적으로 안정감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불안정한 구도를 단단하게 잡아 주는 역할을 한다.

책상 위 책이 자유분방하게 흩어져 있음에도 난잡해보이지 않는 것 또한 세잔의 트릭 덕이다. 그는 석고상의 직진성, 꽃줄기의 수직성, 의자의 등받이까지 수직적 요소를 병렬 배치하는 것으로 그림의 골자를 잡았다. 세잔은 후기에 시각적 트릭을 사용하여 화가가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는 예술 영역을 연구했고, 그 기법은 프랑스에 기원을 둔 입체주의(Cubism)의 시초가 된다. 다만, 애석하게도 그의 노력은 죽음 이후에나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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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관(Parau Api), 폴 고갱, 1892

 

세잔과 비슷한 시기에 자신의 주관을 예술 사조로 승화시킨 두 사람이 더있다. 반 고흐와 고갱이다. 반 고흐는 주관적인 감정을 거친 붓질로, 뭉개진 구도로 드러냈다. 이것은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표현주의(Expressionism) 양식이 됐다. 고갱은 원시 예술의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표현을 발전시켰다. 그가 발견하고 발전시킨 표현 기법은 원시주의(Primitivism)가 된다.

세잔을 포함한 세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세 가지 현대 미술의 기원들 모두 초반에는 미친 예술로 취급받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랑해 마잖는 반 고흐의 작업은 그가 살아있을 때 한 점 밖에 거래된 바 있다. 그러나 현재 이 세 사람의 작품은 싫어하는 사람이 없고, 시장과 대중 모두에게 사랑받는 그림이 됐다. 아웃사이더의 행보가 선구자적 예술로 부활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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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르 교회, 빈센트 반 고흐, 1890

미술계가 반체제로서 현대미술의 기틀을 다지고 있을 때, 건축 역시 나름의 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19세기 말, 건축계는 산업혁명에 따른 대량생산과 복제가 주된 흐름이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수공예 기술은 천시받다 못해 사라졌다. 영국의 건축가들은 이같은 사실에 불만을 품었다. 이들은 값싸고 천한 복제 제품이 주는 유사 심미감에 지쳐 있었다.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과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는 돌파구를 찾아 다양한 실험을 했다. 대량 생산이 절대로 하지 못하는 것들을 찾아다녔다. 재료가 가지고 있는 기능성과 본질을 수공예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이들은 마침내 예술에서 영감을 받은 어떤 기법을 개발하게 되고, ‘새로운 미술’이라는 뜻의 아르누보(Art-noveau)라는 이름을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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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새 방(The peacock room), 제임스 맥닐 위슬러(James McNeil Whistler(1876-1877))

두 사람은 쇠를 구부리거나 일부러 장식적인 문양을 덧붙이는 방식을 사용하여 기존의 획일적이고 구획적인 건축 디자인에 저항했다. 아르누보는 전통적 기법과 장식 예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대량생산과 복제 건축에 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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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누보 양식 포켓 워치, 파텍 필립, 18K 금 바탕에 에나멜과 다이아몬드로 치장

아르누보는 건축뿐 아니라 19세기 예술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상단의 포켓워치의 경우, 오늘날까지 여러 브랜드가 응용, 참고하는 애정 하는 예술 기법이다. 스켈레톤 타입의 시계는 아르누보 양식의 식물과 꽃의 굴곡을 모티브로 무브먼트의 뼈대를 세운다. 이것은 100년도 넘은 방식이지만 여전히 제 골자를 유지하며 업데이트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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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텍필립의 스켈레톤 시계, 칼라트라바 5180/1R, 파텍 필립

다소 완곡한 표현이긴 하지만, 19세기 말 주류 건축 운동은 예술에서 영향을 받은 아르누보 중심의 운동이었다고 요약 할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건축 운동은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했다. 이 시대 젊은 건축가들은 건축이 예술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고방식을 거부했다. 건축가들은 건물의 장식적 요소를 모조리 제거하고, 사용 목적에 비추어 새로운 규칙을 세워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예나 지금이나 참신한 실험은 전통 세력의 힘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라기 마련이다. 20세기 건축의 주된 실험 무대는 미국이었다. 미국의 건물, 그러니까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직접 본 분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텐데, 그것들은 제법 무뚝뚝하고 획일적이다. 뉴욕의 건축물들은 하나같이 거대하고, 성냥갑처럼 생겼다. 실용주의 이론에 기반하여 지어진 건물이라 그렇다.

실용주의 건축가들은 ‘건물’의 기능을 정의하고,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장식을 모두 떼어버렸다. 헨리 호프마이스터(Henry Hofmeister, 1891-1962)와 앤드류 라인하르트(Andrew Reinhard)가 지은 록펠러 센터를 포함하여 뉴욕의 건축물 다수는 실용주의 기조 아래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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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 센터, 헨리 호프 마이스터/ 앤드류 라인하르트

뉴욕 뿐아니라 독일에서도 장식 위주의 건축 예술을 탈피하려는 노력이 계속됐다. 독일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는 산업혁명으로 소외받은 예술과 기계 기술을 한데 모아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는 독일 동부 데시우에 실험적인 건축물을 세우고, 기능 중심의 이론을 설파했다. 이 건물의 이름은 바우하우스(Bauhaus)다.

바우하우스는 교육기관으로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상상하고 실습하는 것을 장려하면서도 물건의 설계 목적을 잊지 않도록 커리큘럼을 구성했다. 이곳에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철제 파이프 의자나 실용적인 합체 그릇이 처음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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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바실리 의자(Wassily Chair), 1925, 바우하우스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 소유(Collection Vitra Design Museum)

바우하우스는 기능주의(Functionalism)를 고도화했다. 기능주의란 ‘목적에 맞게 설계된 형상이야 말로 가장 형태가 아름다운 것이’라는 신념이다. 이것은 19세기 말 주류 관념이었던 장식적이고, 불필요한 덩어리를 떼어내는 이론적 기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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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 100, 적층구조 식기, 1959, 한스 닉 롸이히트(Hans Nick Roericht), 사진가 울프강 아들러(Wolfgang Adler) 촬영

우리는 이전 문단에서 반 고흐의 예술 세계가 당대에는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했고, 그의 사후에나 독일의 표현주의(Expressionism)에 영향을 주었음을 언급한 바 있다. 노르웨이 화가인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가 대표적이다. 그는 정신적 동요가 우리의 감각적 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표현하고자 했다. 이것은 예쁘장하고 매끈한 품새를 띈 것들만을 예술로 여기는 부르주아식 자기만족에 대한 반항이었다. 뭉크는 인생의 즐거운 면만을 묘사하려는 태도는 불성실한 예술이며, 인간의 고통, 가난, 폭력 등에 정직하기를 거부하는 태도야 말로 거짓 예술 행위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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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The scream), 1893, 에두아르 뭉크

이제 예술가들은 미술이 더욱 순수한 것을 추구해야 하며, 그것은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는 자신의 작업으로 순수한 정신성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는 색채와 정신을 대응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칸딘스키는 악보의 음표와 오선을 그림의 색과 선에 대응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치환했다. 그의 캔버스에는 대상(혹은 목적)이 시각적으로 암호화되어 표현되어 있다. 칸딘스키의 예술은 추상미술(abstract art, 비구상 미술)의 기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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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VII(Composition VII), 1913, 바실리 칸딘스키

칸딘스키가 활동하던 시기엔 입체주의(Cubism)운동도 있었다. 입체주의는 대상을 다른 형태로 바꾸려는 노력이다. 이것은 카메라가 등장함에 따라 “미술이 단지 현상을 재현 하는 도구인가?” 하는 질문의 돌파구였다. 대중들은 예술가의 그림과 스냅사진을 비교하면서 예술의 의미를 물었다. 예술가들은 곧 자신의 길을 찾아야 했다. 치밀한 그림이 화가의 목적이라면, 카메라가 곧 예술이 될 뿐 아니라, 기존 예술가들보다 묘사가 더욱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입체주의 화가들은 기존 미술을 던져버렸다. 이들은 솔직하고 단도직입적인 색과 형태를 사용했다. 당대 사람들은 이것을 ‘야수’ 또는 ‘야만’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기존 미술에 비해 표현이 과격하다하여 붙여진 조롱조의 별칭이었다.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와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는 대표적인 입체주의 화가였다. 그들은 평면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면서도 입체감을 주어 한계를 극복하는 예술을 추구했다. 두 사람은 선과 형태라는 단순 요소를 사용하여 사물의 형태를 구성하되, 그곳에 깊이감을 줄 수 있는 기법을 연구했다.

네덜란드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은 입체주의 사조의 구성을 더욱 단순화하고자 했다. 그는 직선과 원색만으로도 충분히 예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누가 보아도 객관적이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회화일 것이다. 몬드리안은 개별자의 ‘눈’이라는 주관성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순수한 형태의 예술을 추구했다. 가장 단순한 선, 그 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생기는 면. 그것을 율동감있게 채우는 것이 몬드리안의 일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근대 및 초기 근대 화가들은 주관적 여정을 사조(-ism)로 발전시킨 연구자들이다. 이제 사상은 계몽주의와 낭만주의를 거쳐 근대주의(모더니즘, Modernism)를 지나고 있었다. 예술역시 근대주의의 영향을 받아 변화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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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 살바도르 달리

근대주의에는 인간의 정신이 정복 가능한 것이며, 이것을 분석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론을 세워나가려는 흐름이 있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이것을 정신 분석학이라 명명했다. 프로이트는 기원에 대한 매혹, 꿈과 환상, 야만성과 유아성의 근원이 우리를 지배한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의 학설은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작업 세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적합한 작업 지침서였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정신적인 것을 끄집어내어 캔버스에 옮겨보기로 했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오슈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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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아이들, 오스카 코코슈카, 1909

작가들은 현실 세계에서 서로 모순되는 사물들을 한데 배치했다. 또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관과 관점의 변화를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기원에 대한 궁금증이거나 인류의 추한 모습, 환상, 황금빛 물결이 흐르는 세계로 표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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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살바도르 달리, 1946

이 시기 화가들은 ‘미술이 자연을 재현해야 한다’는 불문율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였다. 돌이켜보면, 자연을 그대로 모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아름답다 정의하는 것은 미술 본연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통’이란 이름 아래 화가들이 습관적으로 생각했던 고정관념일 뿐이다.

다시 말해, ‘보이기에 아름다운 것을 생산하는 것’은 미술의 존재 이유가 아니다. 모던/포스트 모던 예술에 던지는 각종 아름다움에 대한 의구심이란 일부는 결국 잘못된 학습과 믿음에 기반한다. 보기에 좋아야만 한다는 것. 그것이 오늘날 예술가들이 생각하는 본질이 아니라는 뜻이다. 결국, 티에리 드 뒤브(Thierry de Duve, 1944-)가 요약했듯 현대 미학의 문제는 “무엇이 아름다운가”가 아니라, “예술(과 문학)로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할 수 있다.

현대에 존재하는 괴이하고 악랄한 예술 작업은 대부분 이러한 기준 아래 던지는 질문이다. 서론에 이야기 한 ‘예술에 관한 클리셰적 질문’은 결국 예술계와 일반 대중이 서로 다른 관점으로 예술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모더니즘 예술이란 추함, 가난, 동정, 분노 등 인간의 어두운 감정도 다루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은 더 이상 미술이라는 단어가 제한하는 회화 중심 활동에 국한된 활동이 아니고, 보기에 편안한 것을 주제로 다루는 예술은 더더욱 아니다.

필자는 본 글에서 ‘미술’과 ‘예술’을 혼용해서 사용했다. 오늘날 미술계는 미술과 예술의 단어 사용에 굳이 제한을 두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미술이란 본디 아름다운(美) 것을 다뤄야 하지 않는가?”라고 묻는 사람들의 단어-의미적 접근과 종종 혼선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미술과 예술이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했다.

이제 근대에서 포스트모던을 이야기 할 때가 됐다. 지루한 미술사 여정 지평선 너머로 천천히 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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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라는 이름을 바꾸어 불러도 향기는 그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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