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그림처럼 바라보기 위해서 (4: 다이얼을 캔버스 삼아)

다이얼을 캔버스 삼아

시계에 예술성을 투영하기 가장 쉬운 방법은 다이얼을 도화지 삼아 작업하는 것이다. 시계 제작사들은 고대 그리스의 비례미를 이용해 다이얼 배치를 결정하는가 하면, 아르누보, 아르데코 양식을 사용하여 다이얼을 꾸미거나 바우하우스 스타일을 계승하여 다이얼 요소를 완성한다. 아예 도화지로서 다이얼을 구획하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브랜드도 있다.

베가본다지3(Vegavondage III), 폴 쥬른(F.P. Journe)

비례와 균형을 사용하여 다이얼을 구성하는 것은 고전적이지만 여전히 유용하다. 이것은 시각을 읽기 편리하게 도울 뿐 아니라 심미적으로도 안정감을 준다. 대표적으로 자케 드로(Jaquet Droz)가 삼각형 구도로 나사를 배치하여 안정감을 유지하는 방식이나 쥬른(F.P. Journe)의 다이얼 배치가 있다. 이것은 고전 그리스 예술부터 연구하던 비례와 균형에 대한 미감이 오늘날 기성 제품에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가를 교과서처럼 보여준다.

소네리 뚜르비용(Souveraine Tourbillon), 폴 쥬른(F.P. Journe)

쥬른은 균형감 있어 보이는 다이얼 배치를 추구하지만 실제론 완벽한 정비례를 추구하지 않는다. 완전한 비례는 감상자에게 지나친 안정감을 부여하여 지루해 보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얼토당토않는 곳에 다이얼 요소를 배치하면 시각적 균형감이 무너져 심미성을 잃는다.

때문에 쥬른은 도형을 재활용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다이얼에 사용한 원의 곡률을 파워리저브에 재활용을 하고, 작은 다이얼의 지름을 메인 핸즈 길이와 동일하게 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비대칭 다이얼이 시각적으로 산만해지는 것을 시각적으로 단단하게 잡아 준다.

브레게 클래식 컴플리케이션 Ref. 3795

브레게(Breguet)는 무브먼트의 유선형 곡선과 화려한 기로쉐 다이얼 패턴으로 애호가들의 미감을 자극한다. 클래식 컴플리케이션인 Ref. 3795와 3797은 브레게가 솔리드 케이스백과 스켈레톤 케이스백에서 아르누보 양식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브레게는 무브먼트 브릿지를 장식 요소로 사용한다.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생각하면 무브먼트 브릿지를 직선으로 뻗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러나 브레게는 굳이 무브먼트 브릿지에 굴곡을 주고 그 위에 플루팅(fluted) 세공을 더한다. 다분히 장식적인 예술이다.

브레게 클래식 컴플리케이션 Ref. 3797

브레게는 역사적으로 루이 14세 양식(또는 바로크 양식)을 계승한다 할 수 있고, 미술적으로는 아르누보 양식을 계승한다. 바로크 양식의 정수는 ‘쥬아 드 비바(Joie de vivre, 삶의 기쁨)’이라 할 수 있는데, 브레게의 시계를 보면 부의 풍요로움이 차고 흘러 넘친다. 이러한 양식은 3797에도 잘 담겨 있다. 브레게는 3797의 3/4 무브먼트 플레이트를 아예 캔버스처럼 활용한다. 그들은 무브먼트 위에 담쟁이덩굴의 형상을 가득, 화려하게 채워 넣음으로써 그들의 역사적 정통성과 섬세한 장인 정신의 계승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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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드뷔 엑스칼리버 Ref. 0350

아르데코 양식은 아르누보 양식과 헷갈리기 쉽다. 그렇지만 전자는 후자보다 직선적이며 남성적이다. 로저 드뷔(Roger Dubuis)는 아르데코 양식을 계승하는 대표적인 브랜드다. 이들은 인덱스뿐만 아니라 케이스에도 홈을 파서 시계 분위기를 강인하게 조성한다. 로저 드뷔는 화려한 시계지만 곡선의 부드러움이나 장식미보다는 단단하고 화끈하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까르띠에(Cartier)는 아르데코 양식을 계승하는 또 다른 브랜드다. 산토스의 사각 프레임과 인덱스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다. 아래 있는 드라이브 드 까르띠에가 특히 재미있는데, 이 시계는 까르띠에가 산토스의 전통을 깨지 않고도 어떻게 아르데코 양식을 업데이트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인덱스와 날짜창의 사각 라인, 서브 다이얼 눈금, 방사형으로 버지는 로즈 커팅 인그레이빙(rose cutting engraving) 기법은 까르띠에 고유 디자인 정체성과 아르데코 양식이 함께 공존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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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띠에(Cartier)의 드라이브 드 까르띠에(Drive de Cartier)

바로크 양식 이후 예술가들은 모든 평면을 캔버스처럼 생각하게 됐다. 크레파스를 쥔 아이들처럼, 14세기 예술가들은 귀족들의 사주를 받아 벽과 천정, 자신의 마차, 시계에도 화려한 그림을 그렸다. 풍요로움과 과시욕이 절정인 시기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은 오늘날 회화-시계(artistic watch)로 연결된다. 이것은 시계 본연의 기능을 덮어버리기 일쑤기에 때문에 가독성을 저해한다. 그러나 고급 시계를 찬 현대인이 손목을 보고 시간 확인을 할까? 오늘날, 시계의 본래 기능은 바로크 시대의 그것보다 가치가 적다. 이에 시계 메이커는 과감하게 눈금을 없애고, 케이스를 프레임 삼아 다이얼을 조각한다.

에르메스(Hermes) 슬림 데르메스 그르(Slim dhermes Grr)

에르메스(Hermes)는 시계뿐 아니라 의류, 가방, 액세서리를 만드는 토털 브랜드(total brand)다. 이들은 역사 깊은 디자인 하우스의 명성을 다이얼 위에도 발휘한다. 에르메스는 시계의 기능적 관점을 우선하기보다, 아예 예술품으로 해석해버린다. 이들은 보석 팔찌에 시계를 삽입하는 방식으로 주객을 전도하거나 시계 다이얼에 그림을 그리고 눈금을 생략하는 방식으로 지름 38mm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다.

반 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의 포에트리 오브 타임(Poetry of Time) 제작 과정

 

예술 수단으로서 시계를 해석하는 것으로는 반 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 또한 유명하다. 초기 반 클리프 아펠은 클로버 모양을 한 알함브라 주얼리로 이름을 알렸다. 이들은 상징(symbol)을 주제로 하는 보석 조형에 강하다.

이 브랜드는 럭셔리 기계식 시계를 설치 미술의 관점으로 접근한다. 콩트-주와 에나멜, 샹르베 에나멜, 스테인드 글라스 에나멜, 스톤 인그레이빙 등, 각종 고급 공예 기술을 끌어다가 자신들의 예술 정체성을 투영한다. 반 클리프 아펠은 주얼리 형태와 시계 다이얼 디자인에 일관성을 추구한다. 제품 간 연결성이 끈끈하다. 이것은 시계 제작 회사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공방(工房) 같다. 시계를 제작하는 장인들이 달라도 디자인적 일체감이 있고, 시리즈 별로 반 클리프 아펠 특유의 정체성이 느껴진다. 덕분에 반 클리프 아펠의 작업은 다이얼에 특별한 로고가 없어도 형태만으로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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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거 르꿀트르(Jaeger LeCoultre)의 리베르소 이클립스 빈센트 반 고흐(Reverso Eclipse Vincent van Gogh)

예거 르쿨트르(Jaeger LeCoultre)는 자체적으로 다이얼 디자인을 할 뿐 아니라 예술가를 헌정(tribute)하는 작업도 한다. 이 브랜드는 탁상용 시계 라인인 아트모스(Atmos)에 클림트(Gustav Klimt)의 작업을 새겨 넣는가 하면, 위의 리베르소 이클립스 반 고흐(Reverso Eclipse Van Gogh)처럼 화가의 작업을 그대로 다이얼에 옮기기도 한다. 편리하게 생각하면 미술관이나 관광지에서 랜드마크를 다이얼에 작게 옮기는 것이나, 캐릭터 상품 시계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소위 ‘캐릭터 상품 시계’는 거의 모든 것이 아웃소싱이고 판매처만 고정이다. 그러나 예거 르쿨트르는 영감의 출처만 외부일 뿐이지 모든 것을 자사 브랜드에서 해결한다. 음악으로 비유하자면 전자는 표절, 혹은 짜깁기이고 후자의 경우는 원곡을 편곡하는 것에 가깝다. 만약 예거 르쿨트르가 아닌, 다른 브랜드가 이것을 시도한다 하면 오명이 남을 소지가 다분하다. 그렇지만 예거 르쿨트르는 모든 공정을 하우스에서 완성함으로서 원저자의 아이덴티티를 최대한 존중한 작업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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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거 르쿨트르는 전통 깊은 인 하우스 시계 제작사라는 특장점을 바탕에 깔고, 예술 헌정 시계를 시리즈로 만든다. 점점이 흩어져 있는 역사적 작업을 구슬로 꿰어 자신의 역사로 만든다. 이와 유사한 작업을 하는 다른 하이엔드급 브랜드는 바쉐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이 유일하다.

디자이너와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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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랄드 젠타(Gerald Genta, 1931-2011)

 

제랄드 젠타(Gerald Genta, 1931-2011)는 시계 디자인에서 선구적인 입지를 다진 사람이다. 그는 1950년대 주얼리 업계 수습생으로 들어왔다가 시계 디자인을 시작한다. 젠타는 본인의 디자인 하우스를 만들기 이전에 부품을 공급하는 회사에서 디자인 프로젝트를 수주받아 생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 그는 해밀턴, 오메가, 오메가 피게, 유니버설 제네브와 협업했다.

젠타는 디자인 자문 역으로 컨설팅을 했기 때문에 자유로운 시각으로 시계를 디자인할 수 있었다. 그의 스타일은 특히 케이스와 브레이슬릿 등에서 도드라지게 나타나는데, 이유인즉 50년대만 하더라도 다이얼은 시계 브랜드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주된 수단이었고, 케이싱이나 브레이슬릿은 상대적으로 자유도가 높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젠타는 예술가로서 (자기 브랜드를 제외한) 디자인 정체성을 케이스에 집중적으로 담는다. 그의 디자인은 시계에서 다이얼만이 디자인 요소로 여겨지던 지루한 관습을 보기 좋게 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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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랄드 젠타의 로열 오크 초기 스케치

 

오데마 피게 로열 오크는 그의 천재성이 녹아든 첫 번째 작업이다. 1972년 그는 잠수복 헬멧의 고정 나사에서 영감을 받아서 여덟 개의 나사와 연결부를 케이스 외부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케이스를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즉각적인 성공으로 이어지진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고객들이 이 디자인을 수용하기에 케이스가 상당히 컸기 때문이다(약 38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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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기계식 시계가 점차 과시적으로 변해가면서 젠타의 디자인은 재조명된다. 고객들이 커다란 시계를 찾기 시작했고, 개성있는 그의 디자인이 최우선으로 조명받았다. 이후 그는 쇼메와 반 클리프 아펠, 피아제, 브레게, 불가리, 까르띠에 파샤, IWC 인게니어, 세이코, 그리고 파텍 필립의 노틸러스 케이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개인/브랜드와 협업한다.

그렇지만 보수적인 시계 업계에서 외부 디자인을 한다는 것이 순탄한것만은 아니었다. 2009년, 그는 한 그리스 시계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외부자로서 디자인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로열 오크 이후로 대중들로부터 인정받은 덕분이라고 회상한다. 그리고 필자는 어쩌면 젠타와 같이 자신의 디자인 정체성을 여러 브랜드에 골고루 녹여내는 사람은 이제 다시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젠타의 팔각 디자인 성공 이후, 시계 브랜드들은 이제 다이얼 뿐 아니라 케이스까지 디자인 요소로 인식하게 됐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에릭 지루(Eric Giroud)나 알랑 실버스타인(Alain Silberstein) 같은 인물들이 시계 디자이너로서 단단한 입지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유명 개인 디자이너가 시계 디자인을 아웃소싱 하는 방식의 작업은 기회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20세기의 시계

이제 시계는 20세기 양식을 계승한다. 바우하우스가 가구와 건축뿐 아니라 생활양식으로서 시계 디자인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이 시기 시계는 기능 위주의 디자인을 추구한다. 어떤 시계는 극단적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 바우하우스 디자이너는 과거 시계들의 유산인 지저분한 장식, 꼬여있는 아라비아 필치, 복잡한 핸즈, 펜던트 모양의 케이스 등을 개편한다. 흔히 ‘심플 워치(simple watch)’라 통용해서 부르는 것들이 이 시기에 등장한다. 이들은 아르누보와 아르데코, 색, 장식, 굴곡 등 시계 본 기능 외에 부가적인 장식물을 체로 치듯 걸러 낸다. 시간을 읽을 때 필요한 최소한의 기능만 남겨두고 남은 기능들을 몽땅 분리수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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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스(Nomos) 탕겐테(Tangete)

바우하우스 시계는 기능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방식을 추구한다. 노모스(Nomos)는 바우하우스 디자인을 계승하는 대표적인 브랜드다. 이들은 주간 가독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다이얼을 디자인한다. 인덱스는 간편하고, 핸즈는 시원하게 뻗는다. 이것은 직관적으로 간편해서 시간을 읽는데 무리가 없다. 노모스는 간혹 다이얼에 컬러 바리에이션을 주긴 하지만 이것은 가독성이나 형태에 방해가 가지 않는 선에 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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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융한스(Junghans)도 바우하우스 양식을 계승한다. 그들은 38mm의 널찍한 다이얼에 바 인덱스를 적절한 간격으로 배치하여 가독성을 높인다. 이들 시계는 핸즈가 길쭉하게 뻗어 있기 때문에 시간을 오독할 염려가 적다. 가죽 밴드 또한 장식적 요소가 없고, 동물의 가죽을 사용하면서도 패턴이나 가죽 결 같은 것을 살리지 않는다.

바우하우스 시계는 기능적으로 무결하다. 어떤 의미에서 가장 전통적(classic)인 시계라고 평할 수도 있다. 규칙이 엄밀 할 뿐 아니라, 계승이 꾸준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바우하우스 브랜드들은 업데이트가 곤욕이다. 10년 전에 구매한 시계와 최근의 것 사이에 변화를 주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바우하우스 시계 메이커들은 폰트나 인덱스의 간격을 조정한다거나, 날짜창 크기를 바꾸고, 컬러 바리에이션을 개선하는 등 조금씩 진보한다. 그러나 바우하우스 시계는 디자이너가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간결하고 명료한 맛이 있어서 한 번쯤은 경험하고 싶은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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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띠에(Cartier)의 크러시드(Crushed) 핑크 골드

비정상적인 힘을 받은 듯 찌그러진 시계, 그렇지만 이것은 고장 난 것이 아니다. 핸즈는 지끄러진(Crash) 다이얼 위에서도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짧고, 무브먼트는 다이얼의 굴곡을 따라서 길게 펼쳐져 있다. 이 시계는 까르띠에가 초현실주의자들의 주제를 어떻게 다이얼 위에 표현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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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 살바도르 달리

이 시계는 스페인 초현실주의자 예술가인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의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을 상기시킨다. 까르띠에의 크러시 라인은 시계가 언제나 좌-우 대칭이고, 형태적으로 모난 곳이 없어야 한다는 불문율에 감히 의문을 던진다. 그렇지만 찌그러진 다이얼 위에서도 시간은 흐른다는 형식은 유지하고 있어서, 달리의 그림 속 녹아내리는 시간이나 늘어진 시계 속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는 묘사를 계승한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의 세계가 어떻게 현실로 구현될 수 있는가를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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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루 다이얼에 겹쳐지지 않게 사선으로 자른 가죽 밴드와 로마자 인덱스를 스켈레톤 무브먼트의 브릿지로 활용한 것 또한 영리하다. 이것은 앙드레 브로통(Andre Breton)이 말한 것 같이, “이미지는 정신의 순수한 창조물”이라는 기조를 계승하고 있으며 우리가 고급 시계에 대해 판에 박힌 사고를 하고 있지 않는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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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미지아니(Parmigiani) 오발 판토그래프(Ovale Pantographe)

팔미지아니(Parmigiani)의 오발 판토그래프(Ovale Pantographe)는 까르띠에와 구현 방식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초현실주의적 시간을 다룬다. 이 시계는 팔미지아니가 19세기 영국의 워치 메이커인 바르동&스테드먼(Pardon&Stedmann)의 가변형 핸즈(telescopic hands)를 복원하며 얻은 노하우로 만들었다.

시곗바늘은 계란형의 다이얼을 돌면서 그 길이가 늘었다 줄었다 한다. 팔미지아니는 형태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계란형으로 고정된 케이스에 가변형 시곗바늘을 올린다. 이것은 두껍고 관절 마디가 많은 모양 때문에 실제 사용엔 가독성이 떨어진다. 가독성을 추구하기 위해서 굳이 사장된 기술을 부활시키고 팔이 늘어나는 시계를 만든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팔미지아니가 계란형 케이스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시계는 오로지 심미성과 상상력 위에 올라간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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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발 판토그래프는 필요에 의해 늘어나는 팔을 가진 로봇 형사처럼, 상상하는 대로 시곗바늘의 길이를 조정한다. 편견을 깨고 상상과 미지의 세계를 재현하는 것. 까르띠에의 크러시드 케이스가 정지한 시점으로 초현실주의를 표현했다면, 팔미지아니의 오발 판토그래프는 흐르는 초현실주의다. 두 작업은 오늘날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수만 점의 시계와 다르다. 이것은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시계이며, 무의식의 구현체로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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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니 할터(Vianney Halter)의 안티구아(Antiqua)

비아니 할터(Vianney Halter)는 독립 시계 제작자다. 그가 만든 안티구아(Antiqua)는 거대 함정의 창문이나 비행체의 리벳을 닮았다. 이것은 이미 과거가 된 미래(Past-Future)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양식상으로는 스팀펑크(Steampunk) 디자인을 계승한다.

스팀펑크는 SF 장르 중 하나로 20세기에 21세기의 오버 테크놀로지 미래를 상상하면서 그려지는 디자인이다. 이는 과장된 리벳, 용도를 알 수 없는 파이프, 과장된 움직임을 보이는 기계 구동 등을 찬미한다. 이것은 19세기부터 많은 미래학자들이 상상하던 것으로, 21세기 모습은 리벳이 많은 철판 더미로 봉합된 기계 문명사회였다. 필자도 마찬가지여서, 어릴 적 필자가 그린 상상화 속에서 인류는 거대 유리 돔 속에서 심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고, 리벳이 둘러진 비행체는 하늘과 우주를 날았다.

스팀펑크는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펑크 록 음악 장르의 미래적 사운드에도 등장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현재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다. 리벳 디자인은 공기 저항에 쉽게 망가지고, 돔형 창문은 다른 신물질에 비해 압력에 약해 탐사에 적합하지 않다. 다만, 스팀펑크는 (과학적으로는 거짓임이 밝혀졌지만) 이미 21세기에 도착해버린 우리의 오판을 애정 하는 행위에 가깝다. 이것은 미학적으로는 크게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예술 경계의 확장이나 사상적으로 미술계에 영향을 준 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스팀펑크 디자인은 사조(-ism)로서 가장 근대 문명과 가깝고 지금도 우리를 지나고 있다. 때문에 스팀펑크는 향수를 느끼기도 좋고, 미래적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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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일레타(Miki Eleta)의 타임버너(Timeburner)

최근 시계 업계에서는 스팀펑크 스타일 디자인에 계승이 없는 듯했다. 그러다가 2016년 바젤월드에서 탁상시계 제작 장인인 미키 일레타(Miki Eleta)와 마크 제니(Mark Jenni)가 타임 버너(Time burner)라는 시계를 발표한다.

타임버너는 레트로그레이드로 시간을 표시하고 엔진 모양의 피스톤으로 분을 표시하는 메커니즘을 사용한다. 이 시계는 커봐야 1cm 내외인 밸런스 휠에 비해 구동축이 과장되게 크다. 분침 구동부는 구형 산소 발생기의 압력 눈금계처럼 날카롭다. 케이스는 정체 모를 엔진의 냉각 기관처럼 표면적을 키웠다.

당장 스팀펑크 시계라고 검색해보면 등장하는 디자인은 많다. 구매할 수 있는 가격대도 저렴해서 20만 원 내외로 스팀펑크 시계를 구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들에 대고 스팀펑크를 말하기엔 어딘가 엉성하다. 그 이유는 저가 스팀펑크 시계는 다이얼이나 케이스 모양만 스팀펑크일 뿐, 구동계는 쿼츠나 옛날 무브먼트 메커니즘을 가져다 쓰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비아니 할터의 안티구아나 미키 일레타의 타임 버너는 구동계의 변이나 캐링 암을 직접 설계한다. 이들은 스팀펑크의 오버 엔지니어링 정신을 계승한다. 가독성보다는 기계 문명 자체를 찬미한다. 타임버너를 보고 있으면, 기계식 시계의 심장이 세포 분열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이얼까지 전이된 것 같다. 스팀펑크는 정밀 공학과 신소재 공학, 세련된 디자인 사이에서 다른 차원의 길을 걷는 고유한 장르 예술이다.

이제 시계 디자인은 동시대 예술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서서히 괴기하고 도전적으로 변하는 시계 디자인이 적응할만 한지 재차 묻고 싶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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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라는 이름을 바꾸어 불러도 향기는 그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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