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 한가운데서

저녁을 선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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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건대에서 만났다. 요 며칠 날씨가 따뜻하기에 봄인 줄만 알았는데, 지하철에서 내렸을 땐 옷깃을 목덜미 쪽으로 여몄다. 호스트는 내게 물과 얼음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이마트에 갔다. 건대 이마트는 처음이었다. 입구와 출구를 찾느라 지하를 두 바퀴나 돌았고, 결국 약속한 시간보다 십여 분을 늦었다. 언제 당해도 바보 되는 기분이다. 출구를 찾느라 기웃 거리는 무리가 있고, 그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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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망 심심한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환영해주는 세 사람. 따뜻한 음악. 불이 돌지 않아 아직은 조금 찬 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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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는 <진구네 식탁>이란 곳이다. 직접 요리를 하고, 저녁을 대접할 수 있는 공간을 대여한다(Social Dining). 왜 진구일까 싶었더니 위치가 광진구라서 그리 이름이 지어졌다. 처음 들른 공간에 처음 만나는 친구가 둘이었다. 늘 그랬듯, 카메라를 들고 서성였다. 만약 당신이 앞에 있었다면, 나는 당신의 무릎 뒤로 돌아가 숨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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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트는 메뉴도 직접 인쇄했다. Y는 메뉴판 위에 원준의 얼굴을 그렸다. 따뜻한 목소리를 가진 이들이었다. 추운 겨울이 쉬이 앗아가지 못할 것만 같은 마음이 이들의 손길에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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칵테일이 세팅됐고, 한 잔을 다 마셨을 적부터 말수가 늘었다. 나를 포함하여 네 사람은 모두 동갑이었다. 우리는 친근해지기 전부터 편한 말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세 사람 중 나이차가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처음 몇 번은 존칭이 튀어 나갔다. 말랑말랑한 기분이 들었다. 아는 것이 하나 없어 서먹한 분위기지만 마음이 먼저 누그러져 있는 상황. 보통은 반대가 아닌가. 빨리 친해져 보고자 너스레를 떨어 보지만 심경이 울퉁불퉁한 경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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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을 자르고, 치즈를 부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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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준은 손을 다쳤다. 칼이 빵 위에서 미끄러졌기 때문이다. C와 Y는 밴드를 사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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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듣지 않는 칼이 제일 위험해.”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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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껍질과 올리브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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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살 끓어오르는 냄비를 보고 있었더니 고소한 향기가 방 안을 채웠다. 이쯤 얼굴에 온기가 돌았다. 나는 그것이 취기 때문인지, 친구들의 훈훈한 마음 온도 때문인지 몰라 가만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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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친구가 직접 튀긴 감자칩.. 이 아니고. 요리가 준비되기 전에 한 개씩 주워 먹었던 과자. 원준의 요리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저만치 치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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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네이드한 올리브와 페타 치즈, 구운 사워도우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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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콤한 빵을 베이스로 올리브 알갱이와 페타 치즈의 부드러운 맛이 스며 나온다. 마리네이드에선 레몬 향과 오일이 부드럽게 스며들어있어서, 사워도우 빵의 단단한 식감을 살리면서도 부드럽게 목까지 넘어갈 수 있도록 돕는다. 사진을 편집하던 날, 이미지 만으로 식욕이 돌아 큰 사이즈 햇반을 사서 돌려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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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준의 친구가 인도에서 사 왔다는 통후추. 그리고 요리를 좋아하면 선물을 받는 것이 편하다는 그의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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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추를 개봉하니 코가 움직이는 곳곳에 알싸한 향기가 톡톡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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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물에 면을 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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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를 갈아 뿌린다. 원준을 촬영하는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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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추를 잘 버무린 면을 둘둘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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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를 위에 뿌려서 마무리한다.

카쵸 에 페페 파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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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의 감칠맛을 베이스로 갈아 넣은 통후추의 알싸한 향이 후각과 미각을 자극한다. 면발은 적정한 때에 똑똑 끊어진다. 이것은 음식을 씹을 때 그 질감이 허무하지 않을 수 있게 한다. 대부분의 파스타 조리 방식이 간단하다지만 카쵸 에 페페는 더욱 시도 욕구를 자극하는데, 실은 느끼함과 매운 후추 향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다. 치즈가 너무 많으면 끝까지 다 못 먹게 될 것이고, 반대로 후추가 과하면 물을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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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직접 수비드(sous vide) 조리한 돼지 등심. 양념이 적셔져 노랗게 모여 있는 올리브의 모양이 꼭 개나리 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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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과류를 잘게 부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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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를 팬에 둘러 구이를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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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를 꺼내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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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툼한 등심이 나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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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마리와 월계수 잎을 제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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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 아래 있는 것은 사과를 잘게 갈아 만든 소스. 달콤한 맛을 가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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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릇하게 겉이 익는 등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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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심을 도마 위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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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은 갈색으로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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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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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소스를 곁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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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 등심 뼈와 말랑하게 잘 구워진 스테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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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셀 스프라우트(방울다다기 양배추) 샐러드를 함께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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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를 하는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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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돼지고기 요리 하면 삼겹살 구이, 찌개용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아. 하지만 돼지는 생각보다 다양하게 먹을 수 있어.” 원준이 말했다.

“돼지고기의 재발견이네.” 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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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소스가 부드럽게 접시 위로 오른다.

뼈등심 구이와 사과 소스, 브뤼셀 스프라우트 샐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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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드 조리의 장점은 부드럽게 씹혀 들어가는 식감이다. 표면이 튀겨지듯 바삭한 돼지고기를 뚫고 지나면 부드럽게 밀려내려 가는 육고기 맛을 느낄 수 있다. 스프라우트 샐러드는 도드라지는 질감으로 식사에 부드러운 변주 작용을 하고, 사과 소스는 단맛을 곁들여서 입으로 가져갈 때마다 고소한 풍미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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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요리를 만들어 준 원준을 위해 짧은 글을 남겼다. 이 글을 적는 이제야 한 마디 달랑 남기고 온 것이 생각나서 길게 풀어 적어 본다.

고마운 자리였다. 삶의 중심에 아무것도 없을 때에 마주한 시간이었다. 나는 겉은 딱딱하고 속은 텅 빈, 무의미라는 이름의 과일이었다. 그러나 식사를 하는 중에 천진함을 찾았고, 나는 속에서부터 자라는 단 것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나르고, 잘라서 씹는 물리적 행위를 반복하는 가운데 사람이 녹아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 얼마만인가 생각했다.

Y와 C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분위기를 활기로 채워주었다. 그 이의 크고 둥근 눈은 빛이 들기에 좋아서, 원준을 돕기 위해 곳곳을 부산히 움직일 때마다 보석처럼 반짝였다. 친구의 미소는 참으로 자연스러워서, 내가 짓고 있는 웃음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하게 했다. 호수의 맑은 표면을 응시하는듯한 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를 묻고, 받은 것보다 더 큰 것을 돌려주고자 고민하는 행동 하나, 하나에 고마움을 느꼈다.

이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적었던 메모를 한 갈피 끼워 넣는 것으로, 고마웠던 기록을 덮으려 한다. 원준이 모으고, 덮고, 붓고, 물을 주어 기른 시간이 더욱 큰 수확으로 그에게 돌아가길 바란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사이만 하더라도 괜찮다

휴가를 내고, 집에서 쉬고 싶었다. 사실, 그 정도를 이기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가 식사를 제안했다. 식당 말고, 그가 직접 요릴 해 주겠다고 했다. 퇴근 시간보다 한 시간 더 기다려야 했다. 쉬고 싶었지만, 가도 괜찮았다. 저녁에 만난 사이는 그래도 괜찮았다. 나의 내적 갈등과 미세한 짜증을 굳이 증폭시켜 그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 평온한 표정을 짓고, 처음 보는 이들을 맞이했다. 생애 두 번째 건대 입구다. 첫 번째 기억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두 번째가 오늘 이 시간이었다. 친구들은 모두 살가웠고, 나는 출발하기 전에 쌓고 있었던 피곤함의 벽돌을 몰래몰래 내려놓았다. 친구들은 그런 나의 모습을 못 본 체 지켜봐 주었다.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우리는 열한 시가 넘어서야 지하철 역에서 헤어졌다. 나는 전철 위에 앉아 ‘내게 좋은 관계’란 무엇일까 생각했다. 평온한 채, 무던한 선을 지키고 길게 가는 사이. 그것이 정말 좋은 관계라고, 답을 적었다. 서른에 시작하는 인간관계는 체력이 부족하다. 희비의 고저가 클수록 피로의 무게는 배가된다. 미지근한 온도가 가장 놀기 좋은 온도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사이만 하더라도 괜찮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사이만 하더라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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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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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라는 이름을 바꾸어 불러도 향기는 그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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