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이라는 문장

당신, 이라는 문장

유진목

매일같이 당신을 중얼거립니다 나와 당신이 하나의 문장이었으면 나는 당신과 하나의 문장에서 살고 싶습니다 몇 개의 간단한 문장 부호로 수식하는 것 말고 우리에게는 인용도 참조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도치와 철 지난 은유로 싱거운 농담을 하면서 매일같이 당신을 씁니다 어느 날 당신은 마침표와 동시에 다시 시작되기도 하고 언제는 아주 끝난 것만 같아 두렵습니다

나는 뜨겁고 맛있는 문장을 지어 되도록 끼니는 거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당신이 없는 문장은 쓰는대로 서랍에 넣어두고 있습니다 당신을 위해 맨 아래 칸을 비우던 기억이 납니다

영영 못 쓰게 되어버린 열쇠 제목이 지워진 영화표 가버린 봄날의 고궁 입장권 일회용 카메라 말린 꽃잎 따위를 찾아냈습니다 이제 맨 아래 서랍이라면 한사코 비어 있길 바라지만 오늘도 한참을 머뭇거리다 당신 옆에 쉼표를 놓아두었습니다

나는 다음 칸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쉼표처럼 웅크려 앉는 당신 그보다 먼저는 아주 작고 동그란 점에서부터 시작되었을 당신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이 시작되는 문장을 생각합니다

당신이 있고 쉼표가 있고 그 옆에 내가 있는 문장 나와 당신 말고는 누구도 쓴 적이 없는 문장 더는 읽을 수 없는 곳에서 나는 깜빡이고 있습니다

문득 당신이 기지개를 켭니다 거기서 한참 아득해져 있나요 맨 처음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당신,


미처 마무리 짓지 않은 문장으로 시를 맺은 것이 아름다워요. 사랑에 대한 기억이 글과 서랍을 오가며 끊임없이 심상을 교환하는 구조도 좋고요. 저는 이 시가 참 예쁘다고 생각해요. 사랑하는 이가 너무나 소중해서 문장 부호로 글을 맺지 못하는 글쓴이의 감정이, 서랍 속에 사랑하는 이와 함께했던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 두고, 잉크가 마르도록 그것을 지니고 있는 경험이. 모두 제가 사랑하고, 기억하고 싶던 추억과 닮아 있기 때문이예요. 지금은 당신의 웃는 얼굴조차 떠올릴 수 없게 시간이 흘러버렸어요. 그렇지만 빛이 바랜 영화표와 도장이 거의 다 날아간 커피 쿠폰, 당신께 드리고 싶어서 책장 사이 사이에 꽂아 넣어두었던 마른 나뭇잎은 지난날 제 방 가장 비밀스러운 곳에 한데 모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당신과 함께 했던/하고 싶었던 사랑의 모습이었어요. 이제는 물건으로 남은 추억이 다음 사람에게 해가 될것만 같아 그것을 다 비우고, 또 비웠어요. 그렇지만 방청소를 하다 보면 당신과 함께 했던 기억이, 편지가 책갈피가 보물찾기처럼 툭툭 나오는 때가 있어요. 그때 저는 어찌할 줄 몰라 손을 움츠리면서도 고마운 그대를 생각하며 지난 시간을 시를 읽듯 읊게 되네요.

Advertisements
소고

장미라는 이름을 바꾸어 불러도 향기는 그대로 남는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