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간

루는 여러 차례의 도움을 받고, 몇 차례의 작은 도움을 주며 ‘날(day)’이라 부르는 돌을 세는 일 같습니다. 사람들은 둥근 땅 위 어디서 난지도 모르게 발생하고, 죽순처럼 자라서 오늘 제 어깨를 스칩니다. 저는 왜 사는지 알아내려는 노력을 포기한 지 오래입니다. 그것은 메아리처럼 같은 물음을 반복하게 합니다. 가령, 오늘 제가 어떤 대답을 지어낸다 한다면 바로 몇 시간 뒤에는 그 대답이 우스워지는 다른 물음이 태어나 저의 목덜미를 뭅니다. 그렇지만 당신을 마주하는 일은 여전히 새롭습니다. 저는 디지털 신호 너머 이 이야기가 전해지는 날. 당신이 보낼 시간을 생각하다가 당신께 어떤 애정과 경이를 느낍니다.

지금 비가 내립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계신 곳이 건조하고 추운 겨울이라면. 또는 당신의 시간이 밤, 또는 새벽이라면. 저는 어떤 글로 당신께 인사를 드려야 할까요. 저는 마치 정을 든 채 바위에 글을 새기는 사람이 된 듯합니다. 머릿속엔 셀 수 없이 많은 문장이 떠다니다 일제히 당신께 안부를 묻건만. 손가락은 망치 손잡이를 달싹댈 뿐이고 입술은 물렸다 풀리길 반복합니다. 시간은 야속하게 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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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여 전, 저는 어떤 게임에 접속했습니다. 그것은 한때 친구들과 밤을 새워가며 했던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친구들은 다른 게임으로 종목을 바꿨고 저는 그대로 게임을 접었습니다. 그것을 다시 켜게 된 것은 오랜만에 한 판 하자던 친구들의 권유 때문입니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로그인을 합니다. 로딩 창을 지나서 계정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아이디 바로 아래 생소한 상태 메시지가 적혀 있습니다.

‘겨울 빨리 와줘, 제발.’

게임에 마지막으로 접속했을 때는 한창 여름이었나 봅니다. 제게 지난여름은 얼마나 더운 계절이었기에 혹서를 견디다 못해 짧은 문장까지 만들어가며 분풀이를 한 것일까요. 저는 정신이 나간 듯 상태 메시지를 읽다가 곧이어 허탈하게 웃었습니다. 하나는 제가 지난겨울 어떤 고생을 했는지 생각이 났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이것을 겨울이 한참 지나 여름이 시작될 무렵에나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지난겨울은 제 생애 가장 힘들었던 계절이었습니다. 한겨울에 이사를 했고, 그곳은 장판과 도배를 다시 해야 하는 집이었습니다. 급한 대로 콘크리트 바닥에 판을 깔고 새우잠을 잤습니다. 그 때문에 감기에 걸려서 병원을 다녔습니다. 감기는 낫는다 싶더니 몸살로 표정이 바뀌었습니다. 와중에 입주 청소를 직접 하겠다 만용을 부리는 바람에 쑤시는 몸으로 매일 새벽 두 시가 지나서야 잠에 들었습니다. 제 앓는 소리에 잠이 깼던 적도 있습니다. 그 해 겨울은 저뿐 아니라 모두에게 가혹했습니다. 최악의 한파로 수도가 동파됐고, 집집마다 세탁기가 고장났습니다. 동전 세탁소 앞엔 사람들이 줄을 섰습니다.

작년 여름, 저는 겨울이 이리도 혹독할지 몰랐습니다. 원망을 가득 담아서 여름을 내몰고 겨우제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철 지난 상태 메시지를 읽다가 한 치 앞을 예측하지 못하는 순진함과 자신의 오만에 빈 웃음을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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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는 동네에서 운동을 하다 두 소녀를 만났습니다. 둘은 철제 자전거를 들고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습니다. 철제 자전거는 성인이 들기에도 결코 만만한 무게가 아닙니다. 아니나 다를까, 두 학생의 자전거는 들린 듯 만 듯했고 바퀴는 물에 빠질 듯합니다. 저는 달리던 길을 그대로 돌아 그들에게 다가갑니다.

“도와드릴까요?”

낯선 목소리입니다. 아이들은 한껏 끌어안은 자전거를 내려놓고 저를 바라봅니다. 한 아이는 단발에 핑크색 뿔테 안경을 썼습니다. 다른 아이는 빨간색 뿔테 안경을 끼고 머리를 묶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입니다. 둘은 제안을 듣더니 자리에 서서 눈빛을 교환합니다. 눈빛으로 짐작건대 둘은 친구 같습니다. 먼저, 핑크색 뿔테를 한 아이가 자전거를 건넵니다. 저는 그것을 들고 디딤돌을 밟습니다. 아이를 앞세워 자전거 한 대를 옮기고 다른 친구의 자전거를 들어 시냇가를 건넙니다.

돌아가려던 찰나, 등 뒤에서 “고맙습니다”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는 돌아서 “좋은 시간 보내요”하고 답례합니다. 이제 두 사람은 웃는 얼굴로 대화합니다. 거리는 충분히 멀어 무슨 말을 나누는지 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날 부린 심통이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두고두고 반성할만한 일로 드러나는가 하면, 척박한 곳인 줄만 알았던 마음엔 작은 열매가 맺기도 합니다. 저는 당신께. 모르는 시간에. 모르는 분위기로. 제가 습득한 언어로 인사를 드립니다. 당신은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을 내어 돌 위에 패인 글자를 읽고, 저는 다시없을 시간을 들여 편지를 씁니다. 이것은 두 사람 분의 시간이 드는 어떤 만남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시간을, 이유를. 영영 알 길 없게 그리워할 것 같네요.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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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라는 이름을 바꾸어 불러도 향기는 그대로 남는다

어떤 시간”에 대한 답글 1개

    1. 도요새 니임 🕊🕊 이 곳에서 뵙다니 ㅜㅜ 댓글 감사해요. 🙂 오래도록 기억하고픈 표정이었어요. 험한 세상에 아이들만은 좋은 기억만 가지며 자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도요새 님의 행복도 함께 기원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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