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을 마감하며

릴 적 나는 모든 일정을 기억하려 들었다. 메모장 하나 없이 모든 약속과 준비물을 외우려 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매번 실패했다. 준비물은 고사하고 약속이 있는지 기억조차 못하는 날도 있었다. 어떤 때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두 가지 약속을 동시에 잡기도 했다. 여러 사람이 불편해했다. 몇 번의 작은 위기를 맞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큰 문제는 일어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나의 신용은 잘게 부식됐다. 그 값만큼은 톡톡히 치러야 했다. 나는 거의 모든 약속마다 택시를 붙들어 흔들고, 불을 지르듯 사과를 돌리고, 사정을 과장하며 죽는시늉을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하루 일정만 잘 챙기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렇지만 나는 습관을 들이기 전에 관성부터 찾았다. 수업료는 혹독했다.
못된 습관은 끝내 위기를 맞았다. 태도는 무한하고 우정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신뢰가 바닥을 치는 시기가 왔다. 그제야 나는 정신을 주워담았다. 이제 어떻게든 약속을 상기해야 했다. 처음에는 다이어리에 그것을 기록했다.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터졌다. 다이어리를 들고 다니는 습관이 들지 않아서 하루 일정을 깡그리 날리는 일이 발생했다. 다음에는 포스트잇을 빌려서 할 일을 적었다. 포스트잇은 누구나 하나씩은 가지고 다닌다. 구하기도 쉬웠다. 이번에는 할 일을 적어 둔 포스트잇을 주머니에서 꺼내 다이어리에 옮겨 적기를 잊어버렸다. 세탁한 바지 속에서 잘게 부서진 포스트잇 가루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런 날에는 어김 없이 택시를 잡아탔다. 그렇지만 기억력에 의존하던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알리바이가 빼곡한 다이어리를 증거로 제출하며 결백을 주장하는 것이 맨손으로 자신을 변호하며 사람 좋은 웃음으로 넘어가려는 것보다는 훨씬 설득력 있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은 늘 석연찮았다. 타인에게 변명과 임기응변을 반복하다보면 거울 반대편에서도 합리화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거울로 주먹을 뻗어 그 자식의 멱살을 잡아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참으로 자기 모순적이다. 제 몸에 깃든 습관을 증오하는 동시에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모습이.
시간이 흘러 스마트폰이 나왔고, 나는 다이어리 대신 스마트폰 캘린더에 약속을 적었다. 스마트폰. 그러니까 정확히는 아이폰4와 맥북을 쓰게 된 뒤부터 약속을 잊는 일은 없게 됐다. 두 매체 중 하나는 7세대 아이폰이 됐다. 다른 하나는 맥북 프로가 됐다. 이제는 아이패드까지 있다. 기기는 컴퓨터와 휴대폰을 오가며 일정을 동기화한다. 알람이 울린다. 이동 시간도 계산해준다. 그러니까 세 전자기기는 합심하여 내가 신용을 잃지 않게 독촉한다. 덕분에 나는 두 주일 후 약속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한 달에 한 번 해야 하는 송금도 주기적으로 상기한다. 원고를 쓰는 일도, 친구를 만나는 일도, 다이소에서 작은 물건을 사는 일도 일정 아래 있다.

이제 나는 한 서민의 삶이란 곧 캘린더의 기록과 같지 않느냐는 주장을 한다. 어떤 인물의 정체성이나 생각 또는 감상을 제외한-아니, 어쩌면 일정이야말로 그의 정체성을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 아닐까?- ‘사건(事件)’이 기름기를 쏙 뺀 치킨처럼 달력 한 켠에 주렁주렁 걸려 있다. 캘린더의 주인이 실제로 약속에 나갔는지. 또는 어떤 일정은 주기적으로 등록만 된 채,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용도로 사용한다든지 하는 것. 이런 모든 기록이야말로 우리의 서사가 아닐는지-하는 생각을 섣불리 말하는 것이다.
지, 그러니까 당신. 당신께 묻고 싶어. 당신의 대소사(大小事)도 나처럼 어느 달력인가는 적혀있지 않나요? 수능이라던가, 결혼식 날짜, 데이트하는 날. 하다못해 운전면허 시험날짜 같은 거 말이에요. 몇 시에 누구 언니를 만나고, 어디서 꽃을 찾고, 어디론가 돈을 부치는 일이 기록되어있진 않아요? 만약에 그 기록을 어떤 형사가 입수했다 쳐요. 그러면 형사는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짐작할 수 있지 않겠어요? 당신은 그 짐작이 당신의 전부가 아니라 할 수는 있겠지만 당신 또한 이것을 합리적인 추론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에요.
이제 캘린더 바깥에 존재하는 자신을 더듬는다. 나의 기록, 행실, 눈물, 걸음, 근육의 부조화, 둥글게 굳은 목덜미, 손목 통증, 아끼는 물건, 소홀한 것, 배설, 배출하는 쓰레기의 종류, 입출금 내역, 읽는 책, 매일 듣는 음악을 점검하고 새 형상을 만든다. 사실 앞서 말한 카테고리는 ‘기록’이라는 매체로 뭉뚱그릴 수가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는 것은 기록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일까? 사람을 느낀다는 것은 기록을 헤집는 행위뿐일까? 진시황이 토인을 빚었던 것과 내가 일정을 세우는 일이 다르지 않고, 톨스토이가 묻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하는 질문의 대답. 그것의 실체란 펜을 움켜쥐고 쉼없이 영역표시를 하는 장면인가.
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비록 내가 할 수 있는 이성과 질답은 여기까지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기록 너머엔 분명 사람이 있다. 패턴 너머로 개성이 있다. 존엄한 당신은 여기에 있다. 나는 이유를 모르게 사랑에 빠진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의도적인 실험을 계속한다. 몸을 사리기도 한다. 어떤 날에는 영원 불사할듯 자신을 태운다. 당신도 그러한가. 나는 나 외의 대상에 확정적인 말을 하기가 두려워. 그렇지만 이 글 뒤엔 내가, 당신은 앞에 있다. 두 사람은 눈을 움직여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손가락을 뻗어 서로의 흔적기관을 더듬는다. 나는 이 행위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신이 내게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며 분명한 소리를 낼 것이다. <5월을 마감하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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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라는 이름을 바꾸어 불러도 향기는 그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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