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로 하는 건설적인 논의

건설적인 논의를 생각한다.

나는 논의의 건실함을 이야기하기 앞서 ‘왜 논의 하는가’를 말하려 한다.

논의는 토론하는 것이다. 토론은 보고가 아니다. 토론의 유사어는 보고가 있다. 그러나 토론과 달리, 보고는 방향성이 있다. 보고는 목표 달성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보고서는 목표 달성 유무를 다룬다. 보고는 결론이라는 말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보고와 달리) 논의란 좋은 보고를 위해 방향을 정리하는 자리다. 결국 논의란 먼 미래에 내릴 결론이 좋길 지향한다.

이제 건설적이란 표현은 어떤 의미를 가질지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건설적이란 표현은 ‘옳다’는 말을 함축하고 있다. 문자 그대로의 건설은 부실하거나, 위태로울 수 있다. 그러나 건설이라는 표현은 관용적으로 사용될 때, 바르게 짓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나는 데이터를 의도대로 만들고, 논의하여 보고하는 일을 한다. 데이터는 죄가 없지만 데이터를 의도대로 만드는 일에는 죄가 있어서, 내 일은 보고보다는 논의가 더 잦다. 그러나 데이터를 이야기하면서 건설적인 논의는 쉬이 성사되지 않는다.

많은 데이터 가공인들의 딜레마는 “그래서 어쩌라고?”다. 데이터를 다 뽑아내면, 대부분 심증에 부합하는 증거가 나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여성/남성 농구선수들의 키를 추출해서 발표한다. 이 결과를 들은 다수는 이렇게 반응한다.

“그래, 예상한대로네(그래서 어쩌라고?).”

이것은 비건설적인 반응이다. 비건설적인 반응은 자연스러운 반응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다수가 ‘예상한대로 농구선수들의 키가 나왔다’라는 반응은 착각이다. 세계인 중 얼마나 많은 이가 대한민국 여성/남성 농구선수의 키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어떤 똑똑한 사람은 자신의 예측이 틀리더라도 ‘오차범위’에 있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당신의 오차범위가 타인과 기준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는 1cm 차이를 용인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5cm 차이만을 용인한다. 어떤 이는 10cm 내외의 차이를 용인한다. 어떤 관대한 사람은 100cm의 차이도 옳다고 말한다. 자, 이제 누구의 오차범위가 옳을까?

그러니까 예상한대로 나오는 결과란(또는 예상을 깨는 결과란), ‘예상이 깨졌다’라는 현재형 표현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예상과 결과란 개인적 경험이 강화 또는 소멸하는 것이다. 그 자리엔 깨진 알껍질만 나동그라진다. 건설적인 논의는 알껍질 다음부터다. 그러나 다수의 논의는 알껍질을 벗어나지 못한다.

데이터로 시작한 논의가 비극적으로 끝나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아무 반응이 없다. 논의에 참여한 모든이가 의제를 발전시킬 의지가 없을때 참극이 벌어진다. 이런 자리는 “더 질문 없으십니까? 질문 없으시면 발표를 마치겠습니다.”라는 관용구로 끝난다. 회의에 참여한 이들은 머릿속이 하얗게 됐거나, 자신의 신분때문에 점잖을 빼고 있거나, 점심 메뉴를 고민하고 있다.

두번째는 빌런이 등장했을 때다. 이 빌런은 타인의 데이터를 보며 자신의 지식을 뽐낸다. 이 문장을 적고 한숨이 푹 나왔다. 비극이다. 빌런은 모두가 암묵지로 알고 있는 사실을 자신의 입으로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한다. 모두의 집중을 자신에게 환기한다. 물론 건설적인 사람도 가끔 이 기법을 사용한다. 그렇지만 빌런과 건설적인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건설적인 사람들은 암묵지를 명시적으로 선언한 다음, 새로운 논의를 전개한다. 그렇지만 빌런은 집중시킨 이목을 자신의 지적 능력을 칭찬하는 도구로써 사용한다. 그의 발언이 끝나면, 남는 것이 없다.
두번째 유형의 사람은 제안자의 연구의지를 꺾는다. 예를 들어, 이들은 표적조사를 수행한 사례에 “그것이 우리 유저 전체를 대변하진 않습니다”라는 피드백을 남긴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표적조사의 수행 이유를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그러므로 전혀 건설적인 발언이 아니다. 이러한 논의는 표적조사를 수행할지, 표본조사를 수행할지 고민하는 과정에서나 나왔어야 할 법하다.
이들은 표본조사에서도 제안자의 연구의지를 꺾는다. “이 표본은 국지적인 사례에만 적용 가능합니다”같은 표현이다. 끔찍하다. 표본의 제약과 한계선을 모르는 제안자에는 논의가 아니라 지시가 필요하다. 이러한 표현은 건설적인 논의가 이어지지 않는 한, 제안자의 지적 수준을 의심하는 표현이다.

세번째는 ‘이 산이 아닌가벼’하는 반응이다. 논의란 좋은 결론을 내기 위한 사고 실험의 장이다. 그러므로 방향은 언제라고 바뀔 수 있다. 그렇지만 논의를 위해 준비한 자료에 피드백 없이 없고 방향전환만 있다면, 제안자는 ‘본인의 모든 노력이 미스커뮤니케이션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을 시작할 것이다.

결국 논의란 현재의 결과물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더 나은 결론에 이르기 위해 방향성을 고민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데이터로 시작하는 건설적인 논의는 지금까지의 결과물을 가지고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보수적인 결과와 가장 낙관적인 결과를 상상하고,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합리적인 시도를 함께 고민하는 자리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결과로 무얼 할 수 있을까? 현재 상태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성과는 무엇이 있을까? 현재 수집된 데이터의 한계는 어디까지고, 이걸로 어떤 행동을 추가로 취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어떤 그림을 그려줄까? 지금의 방향은 어떤 상황이고, 궁극적인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중간 다리로서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가?

데이터는 미래를 말해주지 않는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렇다. 그러나 데이터는 인류의 미래(중 일부)다. 인류가 가설을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좁힐 수 있게 된 역사가 오래지 않았다. 수천년 누적됐던 문학은 이백년 전에 수치로 변환됐고, 몇백년 전 수치는 오늘날 컴퓨터 테이블이 됐다.
나는 인류가 데이터를 다루는 역사가 오래지 않았기 때문에 데이터로 건설적인 논의를 하기 위한 대화법에도 훈련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마치 어떤 운동을 잘 하기 위해 운동에 쓰는 근육 뿐만 아니라 운동을 함께하는 이들에게 갖춰야 할 예의도 학습해야 하는 것과 같다.

결국 논의의 장이란 방점을 찍는 행위가 아니라 방점을 찍기 위한 위한 따름 문장을 고민하는 자리다. 데이터로 하는 건설적인 논의란 데이터로 결론을 만들기 위한 자리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상을 점검하고, 현재까지 조사한 합리성을 재확인하며, 미래 방향을 고민하기 위한 디딤돌 터를 다잡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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