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타인이 될 때

2019년 말과 2020년 초에 두 번 상담을 받았다. 지금 이 글은 아래 노래를 들으며 작성하고 있다.

아마도 내담자마다 상담사가 투여하는 치료의 방법이 다를것이다. 나는 두 번의 상담에 위로를 받았다. 나는 자신을 대할때 마음의 여유가 별로 없다. 그래서 나를 향한 질책의 말 만큼이나 자신을 칭찬하는게 어색하다.

아이들에겐 아낌없이 애정을 쏟아붓게된다. 그들은 보고있는것만으로도 희망이 내쪽까지 흘러 넘치는 것 같다. 그런 애정과 위로가 내게 오는 날도 있다. 나는 이것이 몸서리치게 어색했다. 기분은 좋았지만 티가 잘 나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도 모르겠으니. 표정은 여전히 모르겠다. 어떻게 웃어야 하는지. 그렇지만 아이들처럼 웃으면 되려니 싶다. 사랑과 좋은 말이 듬뿍 담길때 아이들이 짓는 표정을.

상담사는 아저씨 남성 교수님. 교수님이고 나이가 많으셔서 그런지 심리적 안정감보다는 가르치려는 태도가 많았다. 그래서 거부감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나를 적극적으로 돕고 싶은데 그 의도를 내가 해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건맞지. 나는 대부분 발화의 의도를 해석한다. 그렇지만 그의 대답에 말을 더 잇진 않았다. 교수님, 저는 이 글을 쓰는 중에도 당신이 고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제 블로그에서만큼은 아저씨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렇게라도 당신을 낮춰 불러야만 상담때 더 말 못한 당신의 권위 수준과 저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내가 모르는 분야의 전문가 말을 신뢰하는 편이다. 다만 의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알아야한다. 그래서 그의 발화 중 다수에 이유를 물었고, 그는 역시 학자타입 상담사인 덕에 여러 이론을 얘기하며 자신의 발화 이유를 설명했다.

아저씨는 두 가지 면에서 배움을 주었는데,

  1. 적절히 즐거워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 나는 기뻐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질 필요가 있다. 타인을 대하듯 나에게도 비슷하게 대해야 한다. 여기서 ‘나’란 곧 내 영역, 내 사람까지 확대될 수 있다. 때문에 내 영역에 너무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 내 사람에게도 좋은 말을 할 수 없다. 타자를 대하듯 마음에 여유를 가져야 한다. 이 말은 마음에 안식을 가져다줬다. 오랜만에 마음이 쉬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2. 기존의 태도를 고수하든, 자신에게 칭찬을 하는 태도를 갖든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기존 태도를 고수하는 것은 마치 한 손으로 밥을 먹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양손으로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저씨의 말을 듣든 말든 결국 자신의 선택이다.

위로.

그러니까 약 한 시간 동안 잘 쉬다 나왔다. 내가 건네지 못한 셀 수 없는 위로가 떠올랐다. 예전처럼 이것을 한참 생각하려 들었다. 그러나 아저씨는 아쉬움은 잠깐이고, 좋은 점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래야 아쉬운 것을 극복할 용기가 난다고. 내가 타인이 될 때, 나는 타자에게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아마도 좋은 말이겠지. 타자에게 다짜고짜 무례하진 않을테니까. 그러면 내게도 좋은 말을 해 주어야 한다.

왼손으로 밥을 먹는 것은 어색하고, 여전히 늦다. 게다가 어른 된 자로서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러니 자신이 나아질 수 있는 소지가 있는 것은 가능성만으로 충분히 설렌다.

소고

장미라는 이름을 바꾸어 불러도 향기는 그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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